한국사에 대하여
시대적 흐름에 따른 각 나라에 대한 고찰
1. 고구려
이번 글에서는 고구려의 중앙집권화 초기 확장의 특징과 이어서 고구려와 위나라의 전쟁,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중앙집권화와 초기 확장
고구려는 여러 예막족 연맹에서 초기 국가로 발전하여 본래의 지역에서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였다. 서기 53년 태조대 때 5개의 지방 부족이 5개의 중앙 지배 지역으로 개편되었다. 대외 관계와 군대는 왕에 의해 지배되었다. 고구려는 현재 중부와 남부의 만주와 북부의 영토를 지배하고 있었지만 모두 산악지대로 경작지가 부족했다. 고구려는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인구를 부양하기에 충분한 자원을 활용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목축민의 성향에 따라 인근 사회를 토지와 자원을 위해 약탈하고 이용하려 하기도 했다. 또한 고구려는 공격적인 군사활동으로 부족 이웃으로부터 공물을 받아 정치적 경제적으로 지배하며 확장했을 가능성도 있다. 태조는 현재 한국 동북지방의 옥저와 동예, 만주 동남지방과 북한 지방의 다른 부족들을 정복했다. 이들 종속부족이 부여한 자원과 인력의 증가로 태조는 고구려를 이끌고 요동반도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였다. 태조대는 일반적으로 정복된 부족의 수장을 남기는 것을 허용했지만, 고구려 왕통과 관련된 총독에게 보고하도록 요구했다. 고구려 관할 하에 있는 부족들은 무거운 공물을 제공했던 것으로 예상된다. 태조대와 그 후계자들은 이 자원들을 고구려의 북쪽과 서쪽으로의 확장을 계속하기 위해 투입했다. 부족 지도자가 중앙 귀족에게 계속 흡수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법률은 농민과 귀족을 규제했다. 왕실의 계승은 형제지간에서 부계지간으로 변화하여 왕실을 안정시켰다. 확대되는 고구려 왕국은 곧 서쪽 요동사령부와 직접 군사접촉을 가졌다. 이 무렵 중국의 무장 공손강이 남쪽 절반을 낙랑사령부에서 분리해 대방사령부를 설치하기도 했다. 고구려 산상왕의 형인 발기는 강씨에게 망명해 고구려 왕위 계승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고구려가 최초의 침략을 격퇴하고 발기를 살해했으나 209년 공손강은 다시 고구려를 침공해 영토 일부를 점령해 고구려를 약화시켰다. 요동으로부터의 압력으로 고구려는 훈허에 있던 수도를 인근 압록강 유역으로 이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2) 고구려- 위 전쟁
한나라 멸망 후 혼란 속에서 군사들은 통제를 잃고 다양한 독립군에게 지배되고 있었다. 공격적인 세력에 의해 통치된 이들 사령부에 둘러싸여 고구려는 중국 조위 왕조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220년에 조공을 올렸다. 238년에 고구려는 위나라와 요동군 사령부를 파괴하기 위한 정식 동맹을 체결했다. 요동이 위나라에 마침내 정복되자 위와 고구려의 협력은 무너졌고, 고구려는 요동 서쪽 끝을 공격하여 244년 위나라의 반격을 선동했다. 고구려는 242년 위전쟁을 통해 중국의 요새를 빼앗으려 함으로써 중국인들의 한국 영토 접근을 차단하려 했다. 그러나 위나라는 고구려를 침략하여 무찌르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244년에 위군에 의해 수도가 파괴되었다. 동천은 군대가 파괴되면서 동쪽 옥조로 잠시 피난한 것으로 전해진다. 위나라는 259년에 다시 침략하였으나 양맥에서 패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중천은 5,000명의 정예 기병을 집결시켜 8,000명의 적을 베어 쓰러뜨렸다고 한다.
(3) 고구려의 부활과 새로운 확장
불과 70년 만에 고구려는 환도를 재건하고 요동군, 낙랑군을 다시 공격하기 시작했다. 고구려가 요동 반도까지 세력을 확장하자 낙랑에 있던 마지막 중국군 사령부는 313년 미천에 정복되고 흡수되어 한반도의 북쪽 지역을 그 틈으로 끌어들였다. 이 정복으로 400년에 걸친 북조선의 영토에 대한 중국의 지배는 끝이 났다. 그 이후로 7세기까지 한반도의 영토 지배는 주로 삼국이 다투게 되었다. 고구려는 4세기 고국원의 통치 기간 동안 큰 좌절과 패배를 겪었다. 4세기 초, 유목민인 몽골 선북족이 중국 북부를 점령했다. 342년 겨울, 무롱족이 지배하던 옛 연의 선북은 고구려의 수도 환도를 공격하고 파괴하여 5만 명의 고구려 남녀를 잡아 노역으로 삼았고, 왕후와 왕비를 포로로 잡았고, 고국원을 한동안 도망치게 만들었다. 선북은 또한 346년 부여를 초토화 시켰고, 부여가 한반도로 이주하는 것을 가속화시켰다. 371년, 백제의 근초고는 치양 전투에서 고국원을 죽이고 고구려의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인 평양을 약탈했다. 살해된 고구려원을 계승한 소수림은 큰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나라의 제도를 개편했다. 내수 안정과 여러 정복 부족의 통일로 돌아서면서 소수림은 새로운 법을 공표하고, 372년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태학(太學)이라는 국가 교육 기관을 설립했다. 고구려가 시안베이와 백제에 당한 패배 때문에 소수림은 향후 이러한 패배를 막기 위해 군사 개혁을 시행했다. 소수림의 내부 정리는 광개토대왕의 확장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의 후계자이자 광개토대왕의 아버지인 고국양왕은 385년에 연나라를, 386년에는 백제를 차례로 침공했다. 고구려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한반도 동북단의 옥저족과 후에 여진족이 되는 만주의 모허족과 같은 봉신, 보병, 노예로 활동하는 반유목민족을 보호하고 이용하였다.
(4) 결론
지금까지 고구려의 중앙집권화적 특징과 초기 확장의 과정, 고구려와 위나라 간의 전쟁, 그리고 고구려가 다시 부활하는 시기의 특징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다음 글에서는 고구려의 황금기 시대와 국내 분쟁에 대해서 소개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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