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 대하여
8. 현대사
[9] 김대중 정부 (1998-2003)
이번 글에서는 한국의 김영삼 정부의 뒤를 잇는 김대중 정부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1) 대통령 취임 전까지의 생활
김대중은 1998년부터 2003년까지 한국의 제8대 대통령을 지낸 한국의 정치인, 활동가이다. 2000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서 한국과 동아시아 전반의 민주주의와 인권, 북한과 일본과의 평화와 화해에 공헌했다. 또 지금까지 노벨상을 수상한 유일한 한국인이기도 하다. 그는 '아시아의 넬슨 만델라'라고 불리기도 했다. 김 씨는 대선에서 승리한 최초의 야당 후보였다. 김대중은 1924년 1월 6일 태어났다가 이후 일제강점기 징병을 피하기 위해 생년월일을 1925년 12월 3일로 수정하였다. 그는 7명의 자녀 중 둘째였으며. 아버지 김은식은 농부였다. 그는 조선시대 관상감 건립에 관여한 병조참판 및 문신을 지냈던 김익수 12대 후손이다. 김익수는 김해김씨인 김영정씨의 손자로 김종필씨와는 먼 친척이다. 그는 당시 전라남도 신안군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가족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위해 근처 항구도시 목포로 이사했다. 김씨는 1944년 목포상업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해운회사에서 사무원으로 일했다. 1945년 그는 첫 번째 아내 차영애와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으며, 제2차 세계대전 패전과 광복 후 그는 회사 경영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막 해방된 조선이 40년 만에 자치권을 놓고 논쟁을 벌였을 때, 그는 친공과 반공의 민족주의 단체에 가입했으나 친공과의 의견 차이로 이탈했다. 1947년 배를 구입하여 독자적인 해운회사를 설립하였고 1948년 목포일보 발행인이 되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시작되면서 김씨는 서울로 출장 중이었다. 목포로 걸어가다가 북한 공산주의자에게 붙잡혀 가까스로 탈출했다가 총살형을 당했다. 김씨는 사업을 포기하고 1954년 초대 대통령 이승만 정권 시절 목포에서 본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54년부터 1960년까지 그는 선거에서 4번 패배했다. 1956년 장명 전 총리가 이끄는 민주당의 공식 대변인으로 취임했다. 김 위원장의 부인인 차영애 씨는 1959년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김씨는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1961년 5월 14일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대표로 선출되었으나, 이틀 뒤 516 쿠데타로 박정희가 정권을 장악하고 이후 독재권력을 장악하여 선거를 회피하였다. 그는 권리를 회복하기 전에 일시적으로 체포되었다. 그는 1962년 기독교 운동가 이희호 씨와 결혼하여 또 다른 아들이 태어났다. 그는 1963년과 1967년 총선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고, 그 후에도 저명한 야당 지도자가 되었다. 1970년 경희대학교 경제학 석사과정을 수료한 뒤,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 대통령에 맞서 야당 후보로 출마했다. 박 대통령은 임기 제한을 철폐하고 3선 출마를 모색하고 있었다. 매우 재능 있는 웅변가인 김씨는 지지자들 사이에서 흔들림 없는 충성심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민주화 추진파 김영삼 씨를 제치고 야당 후보로 지명되었다. 그의 가장 강력한 지지는 고향인 호남으로 국민투표에서 95% 이상을 확실하게 획득해 한국 정치에서 유례없는 기록이 되었다. 박 대통령은 김씨를 통치기간 중 위협의 대상으로 간주했다. 대선 한 달 뒤 김씨가 국회의원 선거운동을 하던 중 트럭이 자신의 차도로 직행해 김 위원장과 보좌진 2명에게 중상을 입히기도 했다. 이 충돌은 박 대통령 정권의 암살 시도였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박 대통령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1972년 독재적 유신헌법을 도입하자 그는 일본으로 출국해 망명운동을 시작했다. 김 씨는 1973년 8월 박 대통령의 유신 프로그램에 대한 비판에 대한 대가로 도쿄의 한 호텔에서 한국중앙정보국(KCIA) 요원에게 납치돼 거의 살해당할 뻔했다. 김 씨는 한국으로 송환되어 가택연금되고 정치활동은 금지되었다. 그는 1976년 반정부 성명 발표에 참여했다가 투옥됐고 1978년 12월 가택연금된 5년간의 형을 선고받았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국제사면위원회부터 양심의 죄수로 지명되었다. 2007년 10월 KCIA의 후계자인 국가정보원은 KCIA가 계획을 실행했음을 인정했다. 국정원은 유감을 표명하고 김씨를 살해해 바다에 투기할 계획이었다고 밝혔다. 국정원은 박 대통령이 적어도 소극적인 승인을 했다고 밝혔으나 당시 박 대통령이 직접 납치를 지시했음을 입증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1979년 12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쿠데타 직전 박 대통령이 암살된 직후, 그는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에 의해 잠시 정치적 권리를 회복했다. 쿠데타 이후 전씨 정권은 김씨를 정치 거점인 광주에서 1980년 5월 일어난 민중봉기를 선동했다며 허위 고발하고 선동과 음모 혐의로 체포하는 등 새로운 탄압 물결에 나섰다. 그는 1980년 9월에 사형 판결을 받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0년 12월 11일 전두환 대통령에게 천주교 신자인 김대중의 면죄부를 요청했다. 미국 소식통들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퇴임하는 시기(지미 카터 대통령과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당선자 사이의 미국 대통령 전환 기간)에 김대중의 처형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음을 이해했다. 한국 정부와 관계가 좋지 않았던 카터 정부는 레이건 대통령의 후임 국가안보보좌관인 리처드 앨런에게 물었고, 그는 김대중의 처형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앨런은 김 위원장의 감형을 요구했고, 1980년 쿠데타 이후 미국의 통치 수용에 열심이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은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 대가로 1981년 2월 레이건 새 행정부의 첫 외국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초청받았다. 그렇게 김 씨의 형은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다. 1982년 12월 그는 미국으로 망명해 보스턴에 잠시 정착했고 하버드대에서 국제문제센터 객원교수로 교편을 잡았다. 해외에 있는 동안 그는 한국 정부를 격렬하게 비판하는 다수의 기사를 집필했다. 1983년 3월 30일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에모리 대학에서 인권과 민주주의에 관한 연설을 했고, 이 대학은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년 후인 1985년 2월, 37명의 지지자와 함께 조국으로 돌아왔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동행자의 상당수가 KCIA에 의해 체포되었고, 김씨 부부는 이희호씨와 함께 곧바로 가택연금 처분을 받았다. 1985년 한국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이 손을 뗀 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야당 정치인 14명에 대한 금지를 해제했지만, 김대중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1987년 전두환에 대한 6월 항쟁으로 전 씨는 김대중을 석방하고 국내 최초의 자유대선을 허용하는 등 국민의 요구에 굴복했다. 전두환 정권의 후계자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6.29선언은 김 위원장이 사면됨으로써 정치적 권리가 회복됐음을 의미한다. 제1야당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당초 후보 1명의 배후에서 단결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어느 쪽이 유리한지에 대한 두 사람의 의견 차이로 김대중은 제1야당인 통일민주당에서 분열되어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대선에 출마했다. 그 결과 야당표가 분열됐고 노 후보가 36.6%의 득표율로 승리했다. 김영삼은 28%, 김대중27%를 득표했다. 김대중은 1988년과 1992년에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김대중은 1992년 민주정의당과 통합해 1990년 민주자유당을 창당한 김영삼 전 대통령을 상대로 또다시 대선에 실패했다. 그 후 김씨는 정계 은퇴를 표명했고, 케임브리지 클레어 홀에서 객원 연구원으로서의 지위를 얻기 위해 영국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1995년에 그는 정계 복귀를 표명했다. 1996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했지만 1997년 대선에서는 네 번째 도전을 시작했다. 당초 여론조사에서 크게 뒤졌지만, 선거를 불과 몇 주 앞둔 아시아 금융위기로 경제가 붕괴되자 현 보수당 김영삼 정권에 대한 국민의 반발로 유리해졌다. 박정희 전 국무총리였던 김종필과 동맹관계를 맺고 1997년 12월 18일 치러진 선거에서 김영삼의 후계자로 지명된 이회창을 꺾었다. 당시 선거 승리는 집권 보수당의 분열이 이회창 후보와 이인제 후보의 분리로 이어져 모두 38.7%와 19.2%를 달성해 국민투표에서 이회창 후보에게 2,600만표의 차로 승리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역사상 가장 차이가 근접한 것이었다. 이회창 씨는 서울대 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대법관 겸 국무총리다. 이 씨는 정치적으로 미숙하고 엘리트주의자로 간주되며 아들들이 병역의무를 회피했다는 그의 서투른 대처가 이 씨의 선거운동을 더욱 악화시켰다. 반면 김대중은 반체제 분위기에 맞는 외부 이미지를 갖고 있어 선거운동에서 언론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전략을 짰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전 대통령의 출신지는 1945년 이후 더욱 부유해진 영남지역이다. 김대중은 전남 출신 대통령으로는 처음 임기를 채운 인물로, 역대 대통령들의 차별적 정책 때문에 외면당하고 발전이 더딘 지역이었다.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당선자는 선거 이틀 뒤 12명으로 구성된 합동비상경제위원회(ECC)를 결성해 퇴임 정부와 새 정부 6명으로 구성됐지만 사실상 차기 대통령의 통제 아래 있었다. 그러므로 2개월 후인 1998년 2월 25일에 김대중이 취임할 때까지 사실상 이 시기의 경제 결정을 담당했음을 의미한다.
(2) 대통령 임기 기간 (1998-2003)
1998년 2월 25일 한국의 제8대 대통령 취임 선서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야당의 승리자에게 평화적으로 권력을 이양한 것으로 역사상 최초의 사례이다. 경제위기 속에서 선출된 김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자신의 정권을 국민의 정부라고 표현했다. 김 대통령은 당선 직후 한국 경제의 건전성을 회복하는 데 IMF 협정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인식했다. 그 후 그는 한국의 주요 대통령 중 가장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실행하여 '신자유주의 혁명가'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김대중 정권의 첫 번째 과제는 투자자들의 신뢰 회복이었다. 정부는 외국 채권자들과 잇따라 집중적인 회의를 열어 한국 단기 부채의 4분의 1을 신속하게 재조정하는 데 성공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권고한 경제개혁과 구조조정을 적극 추진해 한국 경제 지형을 크게 변화시켰다. 그는 국제통화기금(IMF) 채무를 극복하기 위해 한국에서 금 모으기 운동을 시작했다. 김대중 정부는 취임 직후인 1999년부터 국제기준에 따른 연결재무제표 채택을 촉진하기 위해 외부감사인법 개정을 추진했다. 또 상호보증으로 재벌그룹의 한 손실을 본 계열사나 자회사는 계속 은행에서 차입해 건전한 기업에서 자금을 유출할 수 있게 됐으므로 1998년 4월 1일에는 새로운 재벌 내 상호지급보증을 금지하고 2000년 3월까지 기존 보증을 단계적으로 폐지하라고 명령했다. 은행들은 부실기업 폐업을 비롯한 채무 잔액을 줄이기 위해 재벌그룹과 금융구조조정 협정을 협상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독립적인 외부감사, 완전공개, 대기업의 연결재무제표를 포함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회계관행을 도입하겠다는 정부의 약속에 따라 김 정권은 재벌기업의 대차대조표와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높여 우리 경제를 세계 경제와의 더 큰 통합으로 이끈 바 있다. 정부는 또한 적극적인 외국 투자 정책을 채택했다. 다수의 은행이 정부에 의해 폐쇄, 합병 또는 인수되었고 살아남은 은행은 자본을 재편성당했다. 재벌들은 위험할 정도로 높은 부채비율을 낮추고 기업의 투명성과 책임을 강화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대외 직접투자는 금융·기업 개혁 과정에서 안전하고 안정적이며 장기적인 투자 형태로서 필수적이며, 또한 새로운 기술이나 경영 관행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김대중 정권은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 강력한 전술을 사용하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LG그룹이 현대가 지배지분을 인수하는 것에 반대해 합병 협상 도중 철수를 결정하자, 신설된 금융감독위원회는 곧바로 LG그룹 채권단을 불러 징벌적 조치를 논의하고, 여기에는 신용공여 즉시 정지와 기존 대출 회수가 포함되어 세무조사를 실시하겠다고 위협받았다. 결국 LG그룹이 합병에 합의하면서 경영권을 내려놓고 현대에 반도체 사업을 매각하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삼성은 대우에 자동차 사업을 매각하도록 장려되었다. 이 개혁은 재벌이 경영에서 소유권을 분리함으로써 소유 구조를 바꾸는 데 성공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이뤄진 가장 큰 변화는 연결재무제표를 통한 재벌기업 지배구조 개혁과 자체 외부감사, 그룹 내 상호지급보증 축소였다. 재벌은 또한 과도한 레버리지를 줄이고 몇 가지 핵심 역량으로 많은 운영을 통합함으로써 그들의 운영을 합리화했다. 채무 부담을 줄이고 수익성을 높인 사람도 있다.1998년 5.8% 감소한 뒤 1999년에는 10.2% 성장해 눈부신 회복세를 보였다. 한국은 2001년 8월 IMF 대출을 예정보다 3년 앞당겨 상환했다. 수출도 반도체, 자동차, 액정표시장치, 휴대전화 등의 수출을 중심으로 회복되었다.1998년과 1999년의 외국인 투자액은, 과거 40년간의 누계액을 웃돌았다. 외환보유액은 1997년 12월 39억달러에서 1999년 말 740억달러로 한국 단기 대외채무의 2배 가까이 증가했다. 환율은 급격히 달러 대비 30% 상승하여 실제로 한국의 국제 경쟁력을 갉아먹을 우려가 생길 정도로 상승했고 실업률은 하락했다. 1999년 7월 대우 파산에 따른 2차 경제위기가 우려됐음에도 경기회복은 궤도에 올랐다. 또한 대우자동차를 구제하지 않기로 함에 따라 재벌들에게 실패하기에 너무 큰 회사는 없다는 메세지를 전달하기도 하였다. 정부는 파산법을 개정해 기업회생 및 파산신청의 법적 절차를 간소화하고 비존속기업의 시장 퇴출 규정을 간소화했다. 정부 아래에서는 사회보장에 대한 지출이 3배가 되었다. 사회보호지출은 1997년 2조6000억원(GDP의 0.6%)에서 1999년 9조1000억원(GDP의 2.0%)로 증가했다. 김대중의 임기 동안 도입되거나 확대된 가장 큰 정책은 다음과 같다.
- 모든 기업을 대상으로 한 실업보험제도 확충(실질적으로는 30인 이상 기업만 대상), 적격성에 필요한 거출기간 단축, 실업급여기간 연장하였다. 이에 따라 대상 근로자는 1998년 초 570만 명에서 연말 870만 명으로 증가했다. 1998년 5월 한시적인 공공사업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76,000명의 노동자가 참여했다. 1999년 1월까지 이 프로그램은 43만7000명의 고용을 제공했다.
-75만 명의 수익자를 대상으로 하는 일시적인 생활 보호 프로그램. 또, 60만명의 고령자를 대상으로, 수입 검증이 끝난 비합법 사회 연금 또한 도입했다.
김대중 정부는 또한 구조개혁의 중요한 목표로 노동시장 유연성을 강화했다. 김씨는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협력하기 위해 노사정 간에 기업주의적 합의를 형성했다. 노사정 3자 협의를 거쳐 1998년 2월 13일 국회에서 근로기준법이 개정되었다. 새 협정에 따라 기업은 경영의 투명성을 확보하고 직원을 해고할 때 신중한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했다. 구체적으로는 기업이 근로자의 이익을 충분히 고려한 후 고용조정의 법적 근거를 제공하고 해고를 허용하는 것이었다. 한편 노동당은 구조조정을 위한 유연한 인력 감축 실시에 합의하고 생산성 향상을 위해 노력하며 임금 및 근로시간에 관해 비즈니스와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정부에 대해서는 직업 훈련이나 재취업에 관한 정보 제공을 통해 지원 프로그램 강화에 전념했다. 임시직, 파트타임 고용, 재택근무 등의 새로운 고용 옵션이 개발되었다. 정부는 또 경제위기와 구조조정 과정에서 예상되는 대규모 해고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실업보험 보장을 강화·확대할 것을 약속했다. 2009년 8월 18일 오후 13시 43분 김대중은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숨졌다. 그는 7월 13일 폐렴을 앓아 처음 입원했다. 사인은 다기관 기능 장애 증후군에 의한 심정지였다. 2009년 8월 23일 이승만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 근처에서 천주교 전통에 따라 묻혔다. 국립서울현충원으로 향하는 행렬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벌어졌다. 박정희에 이어 한국 역사상 두 번째 국장이였다. 북한은 그의 장례식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3) 대북 정책
그의 대북 관여 정책은 햇볕정책이라고 불린다. 그는 2000년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가진 북한 전체주의 정부에 대해 긴장 완화를 시작하기 위해 이동했다. 이는 남북관계의 중대한 분기점이었다. 2000년 10월 13일, 그는 이러한 노력과 한국에서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활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이러한 노력의 결과 2000년 9월 15일 올림픽 개회식에서 한국의 통일기가 처음으로 올림픽 경기장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사건은 정상회담을 위한 현금 스캔들로 알려진 북한에 적어도 몇 억달러가 지불되었다는 의혹에 의해 크게 얼룩졌다. 현대차는 정상회담 불과 몇 달 전 북한에 5억달러를 송금해 한국 정부가 정상회담 비용을 부담했다는 비판이 있었다. 현대는 이 돈이 북한의 전력 시설과 통신선, 공단, 국경을 넘는 도로, 철도 노선 독점 사업권에 대한 지불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박지원 의원은 현대자동차의 대북 비밀송금을 알선하고 외환거래 및 남북협력업무에 관한 국내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바 있다. 박씨는 제1차 남북 정상회담 개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6년 5월, 그는 징역 3년을 선고받았습니다. 박씨는 2007년 2월 석방되어 같은 해 12월 사면되었다. 또 북한을 설득해 정상회담에 참석시키기 위해 남한이 보관하고 있던 전향 장기수 몇 명이 석방돼 북송되었다.
(4) 유산
2021년 10월 여론조사에서는 김대중, 노무현, 박정희가 긍정적인 유산을 남긴다는 점에서 한국 역사상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대통령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나 박 대통령에 비해 김 대통령은 전 연령층에서 긍정적인 의견이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 대통령 재임 중 그는 한국의 현대적 복지국가를 소개하여 경제회복에 성공하고 경쟁력과 투명성의 새로운 시대를 가져오며 2002년 한일 공동개최된 FIFA 월드컵 등 세계무대에서 한국이 더 큰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한국은 또한 사회로서 보다 민주적이고 인터넷에 연결되며 지식집약적인 인프라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총장 도서관은 김씨의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세워졌으며, 김대중 컨벤션 센터인 광주시에는 김씨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컨벤션 센터가 있다.
(5) 결론
지금까지 김대중 대통령이 임기를 맡았던 김대중 정부에 관하여 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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