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사

한국사에 대하여 8. 현대사 [8] 김영삼 정부

by melodic 2023. 10. 15.
반응형

한국사에 대하여

8. 현대사

[8] 김영삼 정부 (1993-1998)

  지금부터 한국의 노태우 정부에 이어서 김영삼 정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김영삼은 대한민국의 제7대 대통령으로 1961년부터 30여 년간 한국 야당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박정희와 전두환 독재정권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 중 한 명이었다. 1992년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그는 30년 만에 민간인 최초로 취임했다. 1993년 2월 25일 취임하여 대규모 반부패 운동 통솔하였고, 전 대통령 2명을 체포하였다. 또한 그는 국제화 정책 세계화를 통솔하는 등 5년의 임기를 지냈다. 그는 임기 마지막 몇 년간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한국 경제의 침체와 불황에 대한 책임이 컸다. 그 결과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수 백억달러의 조건부 대출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2016년 정치 스캔들로 박근혜가 1~3%로 김을 앞설 때까지 한국 역사상 가장 낮은 6%의 대통령 중 한 명이 되었다. 김영삼은 1927년 12월 20일 일제강점기 한국 거제도에서 부유한 어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족 중에서 1남 5녀 중 장남이었다. 한국전쟁 때 김씨는 학생병으로 육군에 입대한 뒤 육군 정보교육부 장교로 복무했다. 1952년 서울대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했다.

 

(1) 정치 경력

 

  1954년에 김영삼은 한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이끄는 당의 일원으로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선거 당시 그는 최연소 국회의원이었다. 선거에서 승리한 지 몇 달 만에 그는 당을 떠났고,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 헌법을 개정하려 하자 야당에 합류했다. 이후 김영삼은 김대중과 함께 박정희와 전두환 양군정부의 주요 비판자가 되었다. 그는 1969년에 박 대통령의 3선 연임을 허용하는 헌법 개정에 극렬히 반대했다. 또한 그는 이후 유신헌법(1972년)에서 박 대통령의 권력 탈취에 반대했다. 1971년 김영삼은 박정희 후보를 상대로 첫 대선 출마를 시도했으나, 김대중 씨가 후보로 꼽혔다. 1974년 그는 신민주당 당수로 선출되었다. 그는 1976년 국회에서 일시적으로 권력을 잃었지만, 박정희 정권 마지막 해 정계에 복귀했다. 그는 유신헌법이 폐지될 때까지 박 전 대통령의 민주공화당에 결코 타협이나 협조를 하지 않겠다는 강경 방침을 취했다. 또한 새 헌법에서 징역형이 부과되는 박 전 대표의 독재를 과감히 비판하기도 했다. 1979년 8월 김영삼은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200여 명이 신민주당 당사를 농성 장소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이들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다. 1000명의 경찰이 당사를 급습하여 노동자를 체포했다.이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 1명이 숨지고 이들을 지키려는 많은 의원들이 심하게 구타당했고 일부는 입원을 요구받았다. YH 사건은 박 전 대통령의 독재정권이 곧 무너질 것이라는 주장으로 김 위원장의 비난으로 이어졌다. 박 대통령은 김 씨를 당시 수감 중이였던 김대중처럼 정치권에서 몰아내기로 결심하고 중앙정보국(KCIA)에 이 같은 움직임을 지시한 바 있다. 1979년 9월 김영삼의 신민주당 총재직을 정지하는 판결이 나왔다.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김영삼이 미국에 박 대통령의 독재정권 지지를 중단해 줄 것을 요청하자 박 대통령은 그를 수감하려 했다. 하지만 카터 행정부는 인권침해 증가를 우려해 야당 의원들을 박해하지 말라고 강력히 경고했다. 1979년 10월 국회에서 추방되었고, 미국은 워싱턴 D.C.로 대사를 불러들였고, 신민주당 의원 66명 전원이 국회를 사임했다. 한국 정부가 사표를 선별 수리할 계획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김영삼의 고향인 부산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이후 최대 시위였으며, 학생과 시민들이 독재정권 종식을 요구하는 등 인근 마산 등 도시로 확산됐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KCIA 이사에 의해 박정희가 암살되었다. 1979년 12월 12일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에서도 야당에 대한 정부의 탄압은 계속되었다. 김영삼은 민주화운동으로 국회에서 제명되었기에 1980~1985년에는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1983년 5월 전두환 독재에 항의하며 21일간 단식투쟁을 벌였다. 1987년 천 내정자 퇴임 후 첫 민주적 대선이 치러지자 김영삼과 김대중은 대립각을 세우고 야당 표를 분열시켜 천 내정자의 후계자인 노태우 전 대통령이 당선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김씨를 지지하기 위해 출마를 사퇴한 첫 여성 대통령 후보인 홍숙자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일어난 일이였다. 1990년 1월 22일 민주통합당을 노태우 정권의 민주정의당과 통합해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김영삼의 이런 결정은 그를 배신자라고 생각하는 많은 민주운동가들을 화나게 했지만, 그는 부산과 영남에 정치적 기반을 유지했다. 그는 1992년 민주자유당 대선후보가 된 노태우 대통령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노 정권의 여당과의 통합을 선택했다.

 

(2) 대통령 임기 (1993-1998)

 

  여권 후보로는 1992년 대선에서 재벌그룹 현대의 보스 김대중과 기업인 정주영을 꺾은 바 있다. 그는 정식적으로 임기를 유지한 네 번째 민간인이였다. 김영삼 정권은 정부와 경제 개혁을 시도했다. 그는 이 정치적 비자금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듯이 정부의 첫 번째 행동 중 하나는 최고위층에서 시작된 반부패 운동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 반부패 운동은 경제를 지배하던 한국의 대기업 재벌을 개혁하려는 시도의 일환이기도 했다. 김 대통령 정부는 정부와 군 관계자들에게 재무기록 공개를 요구하고 전국에 실명 금융거래제도를 도입했다. 이로 인해 가명으로 은행계좌를 개설하기 어려워지고, 고위 관료와 각료들의 사퇴가 발생했다. 이에 따라 재벌들이 가명이나 익명으로 정치인이나 관료들에게 돈을 송금하고 정부의 비위를 맞추기도 어려워져 이런 관행을 대폭 억제하게 되었다. 그는 군사 쿠데타에서 그들의 역할에 대한 부패와 반역죄로 대통령으로서 두 전임자를 체포해 기소했다. 또한 이전 두 대통령에게 이 같은 뇌물을 준 재벌 총수를 추적했다. 특히 이건희 삼성 회장과 김우춘 대우 회장이 기소된 것이 가장 눈에 띄었다. 김 대통령은 또 전씨와 노씨가 속해 있던 화회파의 정치적 생각을 가진 장군들을 숙청하고, 그때까지 정책 결정에 깊이 관여했다. 이렇게 하나회는 해산되었고 김 대통령 지휘하에 군의 탈정치가 시작되었다. 또한 1993년 3월에는 취임 직후 4만 1000명의 정치수에게 사면을 주고, 12월 12일 쿠데타 이후 광주 대학살로 체포된 민주화 시위대의 형사 유죄 판결을 해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김 대통령의 반부패 행보는 아들이 한보 사건과 관련된 뇌물수수와 탈세로 체포된 후 손상을 입었다. (3) 경제 김 대통령은 재벌의 사회 영향력에 비판적이었지만, 중소기업에 막강한 권한을 부여한 규제완화의 신봉자였다. 집권 시절 그는 특정 자원과 제품 수입을 독점하고, 특정 시장을 지배하던 재벌을 대통령 취임 전 시대의 구식 부분으로 간주했다. 또한 역대 정부의 느슨한 정책에 의해 힘을 부여받았다. 그는 재벌의 부패 행위를 억제할 뿐만 아니라, 지난 수십 년간의 국가 주도 경제 성장 모델과는 대조적으로 세계 경제에서 성공하기 위해 경쟁력을 높일 것을 장려했다. 당시 재벌은 비효율과 전문성 결여로 비판을 받았다. 김 대통령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기업의 부패를 척결하기 위한 신경제 100일 계획을 조속히 발표했다. 그의 국제화와 경제자유주의 전략의 일환으로 외국인 투자를 장려하는 5개년 계획도 추진되었다. 1996년까지 1인당 GNP는 1만 달러를 넘었다. 1994년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북한 핵개발의 중심지인 영변을 공격하는 것에 대해 숙고했을 때, 김 대통령은 전쟁이 두려워 물러나라고 조언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미 항모와 순양함이 한국 동해안 부근에 배치되었고, 미국은 미군과 그 가족을 포함한 미국인들을 대피시킬 계획을 세웠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은 남한 도시들이 파업 때 북한으로부터 먼저 폭격을 받을 것을 이해하고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어떤 움직임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병합부터 종전까지 일본의 전쟁 잔학행위를 옹호해 온 일본 정치인들에 대해 우리는 그들에게 끝까지 예의범절을 가르친다는 말로 대일 외교에서 솔직하고 솔직한 태도를 취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 1년을 경제위기에 직면해 국민들과 함께 고통을 받았다. 1996년과 1997년에 대기업 재벌이 공격적인 확장에 자금을 공급했기 때문에 은행권은 부실채권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동안 재벌들이 세계무대에서 경쟁과 확장을 서두르고 있고 1993년 상업은행의 성장과 단기대출을 가능하게 한 김 위원장의 금융개혁은 이들 기업의 차입 증가를 부추겼다. 많은 기업들이 최종적으로 수익과 수익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재벌은 점점 더 많은 자본 투자를 흡수했다. 결국 과잉 채무가 큰 실패와 인수로 이어졌다. 김 대통령의 아들이 1997년 초에 일으킨 한보 사건은 한국의 경제적 약점과 부패 문제를 국제금융계에 폭로했다. 한보는 1997년 1월에 처음 파산을 선언하여 도미노 효과를 일으켰다. 김영삼 정부는 금융해일이 시작됐을 때 위기에 직면해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였다. 1997년 7월, 한국 제3위의 자동차 제조업인 기아 자동차가 긴급 융자를 요청했다. 김 정부는 구제를 거부하고 1997년 10월에 그것을 국유화했다. 한국 대기업의 도산으로 인한 도미노 효과가 금리를 끌어올려 국제 투자자들을 멀리했다. 아시아 시장 침체로 미국의 신용평가회사 무디스는 1997년 11월 28일 한국의 신용등급을 A1에서 A3로 낮췄고, 12월 11일에는 다시 B2로 강등했다. 이는 11월 주식시장이 이미 약세였기 때문에 한국 주식의 추가 하락으로 이어졌다. 1997년 11월 7일 서울증권거래소는 4% 하락했다. 11월 8일, 이 회사는 7% 급락했다. 11월 24일에는 IMF가 강도 높은 개혁을 요구할 것이라는 우려로 주가는 7.2% 더 하락했다. 다른 저명한 재벌 또한 영향을 받았다. 삼성자동차의 50억달러 규모 벤처기업이 위기로 해산했고 결국 대우차는 미국 제너럴모터스(GM)에 매각되었다. 1997년 11월 22일, 김 대통령은 TV 연설에서 국민들에게 사과했다. 그는 기업들이 과도하게 빚을 진 것과 노동자들이 과도하게 임금을 요구하는 것에 비난했다. 또한 정부가 특별이익단체의 압력으로 강력한 개혁을 단행하지 않았음을 인정했다. 그 결과 김 대통령은 2016년에 탄핵 전인 박근혜가 5%의 지지율로 이 기록을 경신할 때까지 지지율 6%로 역사적으로 가장 인기 없는 대통령이 되었다. 1997년 12월 3일, 국제통화기금(IMF)은 584억 달러를 구제책으로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그 대가로 한국은 구조조정 조치를 취해야 했고, 한국 정부는 금융 부문 개혁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헌법 규정에 따라 재선이 불가능했으며 대통령 임기를 5년 연속의 1회로 제한했다. 그의 임기는 1998년 2월 24일에 종료되었고, 1997년 한국 대통령 선거에서 집권 보수당을 꺾은 김대중 씨에게 승계되었다. 이는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에서 야당으로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의미했다. 김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선전하기 위해 대만에서 열린 신민주주의 글로벌 포럼 등의 행사에 참석했다. 그는 2015년 11월 22일 심부전으로 서울대학교병원에서 87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2015년 11월 26일 국회 잔디밭에서 김 위원장의 TV 국장이 열렸고 황교안 국무총리가 개회사를 맡았다. 이날 오후 김영삼 대통령은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전 대통령 인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4) 결론

 

  지금까지 김영삼 정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다음 글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이 임기를 맡았던 김대중 정부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