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 대하여
시대적 흐름에 따른 각 나라의 고찰
8. 조선
[2] 조선 중기
지금부터 조선 중기의 역사적 특징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조선 중기는 국가를 약화시키는 파벌 간의 격렬한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과 일본과 만주의 대규모 침략으로 왕국이 붕괴될 위기에 처했다. 각각의 사건을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1) 파벌 싸움
사림파는 연산군·중종·명종 때 잇따라 정치적 패배를 당했으나 선조 때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사림파는 정치적 또는 철학적 스승들에 의해 동인과 서인으로 알려진 대립하는 파벌로 분열되었다. 동인은 주로 이황과 조식의 가르침과 철학을 따랐고 서인은 이이와 송혼의 철학을 따랐다. 수십 년 사이 동인 자신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고, 17세기에는 서인 또한 영구히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조선 시대 파벌은 유교 철학에 대한 해석이 다르고 주군이 누구이며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주로 나뉘었다. 이들 계파 간 권력 교체는 종종 반역죄와 유혈 숙청 혐의를 동반했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복수의 순환을 이어갔다 . 1589년에 일어난 정여립의 반란은 조선시대 중기의 파벌 싸움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 반란은 동인과 서인의 갈등이 극에 달해 발생한 사건으로, 동인 출신인 정무파와 동인을 지지하는 일부 서인 세력이 협력하여 진행되었다. 정여립은 동인 출신으로, 동인 세력을 지지하고 동인의 권력을 확대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정여립은 동인과 동조한 일부 서인 세력의 지원을 받았다. 반란은 군사적인 충돌과 세력 간의 힘의 대결로 이어졌다. 정여립은 반란을 주도하며 일시적으로 권력을 획득하고 일부 지역을 점령했다. 그러나 반란은 서인의 지원을 받는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반란 참여자들은 처형되거나 숙청되는 등의 처벌을 받았다. 정여립의 반란은 동인과 서인 간의 갈등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조선 중기의 파벌 싸움의 한 부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사건은 동인과 서인 사이의 권력 다툼과 정치적인 갈등의 한 예시로서, 조선시대의 정치와 사회 변화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2) 임진왜란 (1592년 - 1598년)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군이 조선에 대한 대규모 침략을 시도한 전쟁이다. 이 전쟁은 조선 시대 중기에 벌어진 가장 큰 전쟁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 당시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에서 권력을 쥐고 있었으며, 일본을 통일하고 외국 정벌을 추진하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조선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외침정책을 펼치고 있었으며, 일본의 군사적인 위협에 대비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1592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군은 조선에 대한 침략을 시작했다. 일본군은 조선에 상륙하여 수많은 도시와 마을을 점령하고 파괴하며, 조선의 국민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일본군은 조선을 통과하여 중국을 목표로 삼았으나, 중국의 저항으로 인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조선에 집중하게 되었다. 조선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저항을 시작했다. 이순신 장군을 중심으로 조선군은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며 저항했다. 조선은 민간인의 동원과 조선 왕족, 귀족 등의 협력을 받아 전쟁에 참여하였으며, 이를 통해 일본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중국의 미국왕(明宣宗)은 조선의 도움을 주기 위해 조선에 군사적 지원을 보냈다. 조선과 중국은 협력하여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1598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사망하였고, 일본군은 조선과 중국의 저항으로 인해 철수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은 조선의 승리로 끝났으며, 조선은 일본군을 격퇴하고 자국을 지켜냈다.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 사이의 역사적인 전쟁으로, 조선의 저항과 중국의 지원을 통해 승리로 이끌어냈지만 전쟁으로 인해 많은 희생과 파괴를 초래하였으며, 조선의 문화재와 역사적인 유산에도 큰 타격을 입혔다.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며, 조선시대의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3) 만주의 침략 (정묘호란, 병자호란)
일본의 침략 후 한반도는 괴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한편 여진족의 지도자인 누르하치(1583년~1626년)는 만주 여진족을 강력한 연합체로 통합했고 아들 홍타이지(1626년~1643년)는 만추로 개명했다. 1618년 명나라에 대해 일곱 가지 불만을 표명한 후 누르하치와 명나라는 몇 차례 군사 충돌을 벌였다. 이때 누르하치는 조선 광해군(16081623년)의 도움을 필요로 했고 명나라 궁정도 지원을 요청했기 때문에 조선 국가를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했다. 광해군은 중립을 지키려 했으나 히데요시의 침략으로 조선을 구한 명나라를 지지하지 않자 대부분의 관리들이 그를 반대했다. 1623년 광해군은 폐위되고 광해군 지지자들을 추방한 조선 인조(1623-1649년)로 왕권이 대체되었다. 새 국왕은 선대의 대외 정책을 뒤집고 명나라를 공공연히 지지하기로 했으나, 1624년 군사령관 이갈이 이끄는 반란이 발발하면서 조선 북부의 군사 방어를 파괴하였다. 반란이 진압된 후에도 인조는 수도의 안정을 확보하기 위해 군대를 투입해야 했고 북부 국경을 지키는 병사는 적어졌다.
- 정묘호란: 1627년에 만주족은 조선을 침공하였다. 만주족은 조선의 경계를 넘어와 수도인 한양(서울)을 목표로 삼았다. 조선은 만주족의 침공에 대비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방어 준비를 갖추려 노력했지만, 만주족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조선을 공격하였다. 만주족은 한양을 점령하고 많은 조선 국민을 포로로 잡아갔으며, 조선은 큰 피해를 입었다.
- 병자호란: 1636년에 홍무왕이 이끄는 만주족은 다시 한 번 조선을 침공하였는데, 이번에는 만주족이 조선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고 조선을 병합하려는 의도로 침공했다. 만주족은 조선의 왕족과 귀족들을 포로로 잡아가며 조선의 지배권을 탈취하고자 했다. 조선은 저항을 시도하였지만, 만주족의 군사력이 압도적이었고 조선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만주 침공으로 인해 조선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조선의 왕족과 귀족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조선의 영토는 크게 축소되었다. 조선은 만주족에게 복종하고 조선 왕조는 만주족에 의해 통제되는 상황이 되었다. 이후 만주족은 조선을 병합하여 대중국으로 지정하였고, 조선은 고려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조선 중기의 만주 침공은 조선에 큰 타격을 입힌 사건으로, 조선의 영토와 국가적 자주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사건은 조선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으며, 만주족의 영향력이 조선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3) 결론
지금까지 조선 중기의 역사적 사건들을 살펴보았다. 조선 중기는 임진왜란과 만주 침략으로 인한 외적인 위협과 정치적 불안정이 지속되는 시기였다. 다음 글에서는 조선 후기의 역사적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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