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 대하여
시대적 흐름에 따른 각 나라의 고찰
8. 조선
[3] 조선 후기
이번에는 조선 후기 역사의 특징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1) 실학의 출현과 조선 르네상스 시기
일본과 만주로부터의 침략 후 조선은 200년 가까이 평화를 경험했다. 조선은 실학의 출현을 목격했다. 초기 실학자 그룹은 공무원 시험, 세제, 자연 과학의 전면적인 개혁과 농정 및 농업 기술의 개선을 주장했다. 두 번의 침략으로 황폐해진 조선사회를 재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현종 때의 영의정을 지냈던 김육의 지도 하에 펼쳐진 이 개혁은 국고와 농민에게 매우 유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인조 반정 이후에 성립된 남인과 서인의 공존체제가 붕괴되었다. 예송 논쟁 이후 숙종과 경종 치세하에서 특히 계파 갈등이 심해지면서 '환국'이라 불리는 지배 계파의 급격한 교체현상이 일상화되었다. 숙종 초기에 남인들은 어떻게든 지배적인 파벌이 되어 서인들이 권력을 잃게 하였다. 그러나 남인들의 권력 상승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파벌이 왕의 힘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믿었던 숙종은 집권세력의 급격한 역전으로 이어져 파벌 간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세 명의 피비린내 나는 환국 사건 이후 남인들은 중앙정부에서 세력을 잃었고, 지배적인 서인들은 남인들을 거부하는 강경론자와 남인들에게 우호적인 온건론자로 나뉘었다. 이 변화는 다른 파벌을 배제해야 할 파벌로 간주하는 정치적 급진주의를 가져왔다. 반면 다음 왕인 영조(재위 1724-1776)와 정조(재위 1776-1800)는 대체로 계파 간 균형과 평등을 유지하는 정책인 탕평책을 추구했다. 두 왕은 조선왕조의 제2차 부흥을 주도했다. 영조의 손자 정조는 조선의 문화적 정치적 위상을 향상시키고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왕립도서관인 규장각을 설립하는 등 다양한 개혁을 단행하였다. 정조는 또한 사회적 지위 때문에 정부의 직책을 맡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관직을 개방하고 대담한 사회적 사업를 주도했다. 정조는 많은 실학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정조 때에는 조선의 대중문화가 더욱 발전하고 발전하기도 하였다. 당시 실학자들은 역사, 지리, 수필, 언어에 대한 한국의 연구를 시작으로 국가의 전통과 생활양식에 대한 성찰을 장려했다.
(2) 세도 정치의 출현
정조 사후 조선은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다. 내부적으로는 왕실 사돈에 의한 '세도정치'의 결과로 국가법질서의 기반이 약화되었다. 어린 순조는 1800년에 아버지 정조를 계승했다. 정조의 서거와 함께 노론은 파벌과의 유대가 강했던 정순왕후의 섭정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천주교도 박해를 시작했다. 그러나 왕후의 은퇴와 서거 이후, 노론은 점차 쫓겨나고 순원왕후의 아버지였던 김조순의 안동김씨가 권력을 잡게 되었다. 점차 안동 김씨가 궁궐을 장악하게 되었다. 안동 김씨의 지배와 함께 세도정치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사돈의 혈통이 정권의 요직을 독점하며 정계를 장악했고 왕위 계승에 개입했다. 이 왕들에게는 군주의 권위가 없어 정부를 통치할 수 없었다. 왕실 사돈들이 행사한 권력에 압도된 다른 귀족 가족들은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권력이 왕실 사돈의 손에 집중되면서 통치 과정에 혼란이 생기고 부정이 횡행하게 되었다. 명목상의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 권력의 가문에 거액의 뇌물이 제공되었다. 낮은 지위들까지도 매매되었다. 60년간 지속된 이 시기는 조선 사람들의 극심한 빈곤과 전국 각지에서의 끊임없는 반란이 동시에 나타난 시기였다. 대외적으로 조선은 점점 고립주의적이 되었다. 조선의 통치자들은 외국과의 접촉을 제한하려고 했다.
(3) 조선 왕조의 붕괴
1863년에 고종이 즉위하였다.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성년이 될 때까지 그를 위해 통치했다. 1860년대 중반 동안 그의 섭정은 고립주의였으며, 1866년의 프랑스의 한국에 대한 항쟁으로 직접 연결된 정책이였다. 그의 통치 초기에는 왕권 소재지인 황폐해진 경복궁을 복원하려는 대규모 노력도 있었다. 1862년부터 1864년까지 동학의 지도자인 최제우에 의해 추진된 반란 운동은 최제우가 처형될 때까지 한국 남부를 점령하기 위해 농민군을 모아 벌여졌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안동 김씨 등 사돈의 권력과 권위가 급격히 쇠퇴했다. 그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를 없애기 위해 정당이나 가족 계열을 언급하지 않고 사람을 승진시켜 국민의 부담을 줄이고 국가 경제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조세 개편을 실시하였다. 1866년의 셔먼 장군 사건에 이어 1871년에 미군과 한국군이 '군함 외교'를 시도하다 충돌했다. 1873년 고종은 왕위 계승을 선언했다. 이후 흥선대원군이 은퇴하면서 민비(나중에 명성황후로 불림)는 궁중에서 권력자가 되었고 그녀의 가족은 높은 조정의 지위에 있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서양의 군사기술을 습득하여 1876년에 조선에 강화조약을 강제로 체결시키고, 3개의 무역항을 개방하여 일본의 치외법권을 부여했다. 해밀턴 항구는 1885년에 영국 해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많은 조선인들은 자신들의 땅에 대한 일본과 외국의 영향력과 조선왕조의 부패한 압제를 경멸했다. 1881년에 근대적인 정예부대인 별기근이 일본 훈련병과 함께 결성되었다. 다른 병사들의 급료는 억제되었고, 1882년에는 폭동을 일으킨 병사들이 일본군을 공격하여 명성왕후는 시골로 피난할 수밖에 없었다.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으로 농민들이 봉기하고 농민 지도자 전봉준이 1894년 1월 11일에 고부 전투에서 지방 통치자 조병갑의 세력을 물리치는 등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전투 후 조씨의 재산은 농민들에게 전해졌다. 5월까지 농민군이 전주에 도착했고, 조선 정부는 반란을 종식시키기 위한 지원을 청나라에 요청했다. 청나라는 3000명의 군대를 파견하고 반란군은 휴전을 협상하였으나 일본은 청나라가 존재하는 것을 위협으로 여겨 8000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1894년 6월 8일 서울의 왕궁을 점거하고 친일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는 곧 일본과 청나라 사이의 전쟁(1894-1895)으로 발전하였고 이는 주로 한국에서 싸웠다.
(4) 대한 제국의 설립과 식민지화
더 큰 열강들의 침략에 압박을 받은 조선 조정은 국가의 청렴성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끼고 1897년에 광무개혁과 함께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고종은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기 위해 황제의 칭호를 받았다. 엄밀히 말하면 1897년은 제국의 정식 명칭이 바뀌어 조선시대의 끝을 의미한다. 일본과 러시아에 의해 동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는 여전히 통치하고 있었다. 복잡한 일련의 작전과 대항책으로 일본은 1904년에 포트 아서 전투에서 러시아 함대를 격퇴했다. 1904~1905년 러일전쟁과 포츠머스 조약의 체결로 일본이 한국을 지배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1905년에 피보호국 조약이 체결된 후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이토 왕자는 1909년에 하얼빈 역에서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에 의해 암살되었는데 한국의 첫 초대 총감이다. 1910년 일본 제국은 마침내 조선을 병합했다. 비록 그는 하얼빈의 기차역에서 1909년 한국의 독립운동가 안중근에 의해 암살되었지만, 이토 왕자는 한국의 첫 통감이었다. 1910년 일본 제국이 마침내 한국을 합병했다.
(5) 결론
지금까지 조선 후기 역사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다음 글에서는 이어서 조선 시대의 정치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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