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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한국사에 대하여; 시대적 흐름에 따른 각 나라의 고찰 8. 조선 [1] 조선 초기

by melodic 2023.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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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 대하여

시대적 흐름에 따른 각 나라의 고찰

9. 조선

  조선 시대(1392년~1897년)는 대한민국의 전신이 되는 국가로, 조선 왕조가 통치한 시대이다. 조선 시대는 고려 시대의 멸망 이후에 시작되었으며, 정치,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측면에서 특징적인 변화와 발전을 이루었다. 먼저, 조선 초기 시대의 주요 역사적 사건을 살펴보겠다.

 

[1] 조선 초기 (14세기 말-16세기 중반)

 

(1) 조선의 창립

 

14세기 후반에 918년 건국된 5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고려가 비틀거리다가 수년간의 전쟁으로 그 기반이 무너진 원 왕조에서 쏟아져 나왔다. 명나라의 출현으로 고려 궁정은 대립하는 두 파벌로 분열되었고, 하나는 중립을 주장하여 많은 고려인들이 요동반도를 탈환하려 했던 것이다. 고려는 원나라와 명나라의 대립에서 중립적인 제3자 관찰자였으며 둘 다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1388년에 명나라 사신이 고려에 와서 옛 쌍성현의 영토를 명나라에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국토는 임진왜란 때 몽골군이 점령하였으나 원나라 왕조가 약화되면서 1356년 고려에 의해 매립되었다. 이 행위는 고려 궁정 내에서 소동을 일으켰고, 최영 장군은 명나라가 지배하는 요동반도의 침략을 주장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이성계 장군이 공격을 주도하도록 선택되어 반란을 일으켜 수도 개경(현재의 개성)으로 돌아와 쿠데타를 일으켜 아들 장씨(1388년)에게 유리한 고려 우왕을 쓰러뜨렸다. 이후 유신에 실패하여 우왕과 그의 아들을 죽이고 왕여라는 왕족을 강제로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고려의 공양왕이 됨). 이씨는 1392년 고려 충신 정몽주를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원주로 추방하고 스스로 즉위한다. 고려 왕조는 474년 통치 끝에 멸망했다. 재위 초기 현재 한국의 지배자인 이성계는 자신이 통치한 나라에 고려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하여 단순히 왕족계를 자신의 것으로 바꿈으로써 500년 전 고려 전통을 유지하는 풍격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고려의 잔당과 지금은 몰락하고 있는 왕씨에게 충성을 맹세한 권문귀족들이 여러 차례 반란의 위협을 받은 후, 개혁된 궁정에서는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 새로운 왕조 칭호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태조는 새로운 왕국의 이름을 지을 때 '화령'과 '조선'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했다. 태조는 많은 내부적인 검토와 이웃 명왕의 승인을 거쳐 국명을 조선으로 선포하고 고조선을 기리게 된다. 또한 개경(현대 개성)에서 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2) 왕자들의 싸움

 

새로운 왕조가 등장했을 때, 태조는 어떤 아들이 그의 후계자가 될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꺼냈다. 비록 신의왕후에 의해 태조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이방원이 그의 아버지의 권력 상승을 돕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했지만, 국무위원 정도전과 남은은 그들의 왕에 대한 영향력을 그의 여덟 번째 아들인 (신덕왕후의 둘째 아들) 이방석을 1392년에 왕세자로 임명하기 위해 사용했다. 이 갈등은 주로 새로운 왕조의 이념적, 제도적, 법적 기반을 형성하고 마련한 정도전이 왕이 직접 통치하는 절대 왕정 확립을 원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태조의 지원으로, 정도전은 왕자들의 정치적 개입을 금지하고 그들의 사병을 폐지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왕실의 권력을 계속 제한했다. 양측은 서로의 큰 적대감을 잘 알고 있었고, 먼저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새 왕조가 탄생하자 태조는 어느 아들이 그의 후계자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태조의 5번째 아들인 이방원이 아버지의 권력승계에 가장 기여했으나, 정도전을 비롯한 신하들은 1392년 왕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8번째 아들인 이방석(신덕왕후의 차남)을 왕세자로 추대했다. 이러한 갈등은 누구보다 새로운 왕조의 기반을 형성하여 세운 정도전과 이방원의 의견 차이로 인한 것이었다. 정도전은 조선을 왕이 임명한 대신들이 주도하는 왕조로 보고 있었던 반면 이방원은 왕이 직접 통치하는 절대군주제를 수립하려 했다. 태조의 지원을 받아 정도전은 군주의 정치적 관여를 금지하고 사병을 폐지하려 함으로써 왕실의 권력을 계속 제한했다. 양측은 서로의 큰 적대감을 품고 있었고, 먼저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태조가 둘째 부인을 애도하고 있을 때 이방원은 1398년 왕세자를 비롯한 두 아들(이복형제)과 정도전을 비롯한 궁궐을 습격해 먼저 공격했다. 이 사건은 '왕자들의 첫 번째 싸움'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왕위 계승을 위해 아들들이 서로 죽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 둘째 아내의 죽음으로 심리적으로 지친 태조는 퇴위하고 곧 둘째 아들 이방과를 정종으로 즉위시켰다. 정종이 군주로서 가장 먼저 행한 일 중 하나는 세력 다툼에서 벗어나 상당히 편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개경에 도읍을 전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방원은 실권을 유지하고 곧 권력을 갈망하는 형 이방과와 대립하게 된다. 1400년 이방원파와 이방과 진영의 긴장은 '2차 왕자 싸움'으로 알려지게 된 전면적인 갈등으로 고조되었다. 투쟁의 여파로 패한 이방과은 도산으로 유배되었고, 그의 지지자들은 처형되었다. 철저히 협박당한 정종은 이방원을 후계자로 추정하고 스스로 퇴위했다. 같은 해 이방원은 조선의 제3대 왕 태종에 즉위했다.

 

(3) 왕권의 강화

 

  조선 태종(재위 1400년~1418년)은 조선 왕조 초기에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안정을 추구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다. 태종의 왕권강화 정책은 다음과 같다.

 

- 문방사대 설립: 태종은 문신 계급을 강화하기 위해 문방사대를 설립하였다. 문방사대는 유능한 인재를 발굴하고 교육하는 중요한 기관으로서, 국가의 재능 있는 인재를 육성하여 정치적 안정과 국가 발전에 기여하였다.

 

- 군사력 강화: 태종은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군사 개혁을 추진하였다. 군사 조직을 개편하고 병력을 강화하여 외적 침입에 대비하였으며,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군사 교육과 훈련을 강화하여 군대의 전투력을 향상시켰다.

 

- 중앙집권 정책: 태종은 중앙집권을 강화하여 왕권의 권한을 확대하였다. 지방의 독립성을 제한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하여 지방 관리체계를 통제하였다. 이를 통해 왕권의 통치력을 강화하고 정치적 안정을 추구하였다.

 

- 법률개정: 태종은 법률 개정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였다. 법령을 개정하여 왕의 권한을 강화하고, 왕의 명령에 반하는 행위를 엄중하게 처벌하였다. 이를 통해 왕의 권위와 권력을 보호하고 왕의 명령에 복종하는 사회 질서를 확립하였다. 태종은 이러한 왕권강화 정책을 통해 조선 왕조의 국가 안정과 발전을 추구하였다. 그의 정책은 조선시대의 국가 체제를 강화하고 왕권을 중심으로 한 통치 체제를 구축하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4) 세종대왕

 

  세종대왕(재위 1418년~1450년)은 조선시대에서 가장 위대한 왕 중 한 명으로 평가되며,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세종대왕의 주요 업적은 다음과 같다. - 한글 창제: 세종대왕은 국민들이 쉽게 읽고 쓸 수 있는 글자체를 필요로 하는 상황을 인식하고, 1443년에 한글을 창제하였다. 이를 통해 한글은 한국어를 표기하는 효율적이고 간편한 체계가 되었으며, 국민들의 교육과 문화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 과학 기술 발전: 세종대왕은 과학 기술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과학기구인 지도원을 설립하여 천문학, 지리학, 의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를 지원하였고, 집현전에서는 다양한 기술과 발명품들이 개발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천문기구인 자취기, 의학 기구인 향약도 등이 있다. - 문화예술 지원: 세종대왕은 문화와 예술을 지원하였다. 세종대왕은 문인들에게 귀한 기회와 재료를 제공하여 문학, 음악, 회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창작과 발전을 도모했다. 또한, 세종대왕 자신도 문학 작품을 창작하였으며, 훈민정음을 통해 국민들에게 교훈과 가치를 전달하는 문학 작품을 발표하였다. - 법률 개혁: 세종대왕은 법률 개혁을 추진하여 사회 정의와 국민 복지를 증진하였다. 사법 제도를 개선하고 형벌 체계를 개혁하여 형평성과 공정성을 강화하였으며, 농민과 소상공인을 보호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하였다. - 문물의 보급: 세종대왕은 국민들의 교육을 중요시하였다. 한글의 보급을 통해 국민들의 읽고 쓰는 능력을 향상시키고, 서적의 출판과 보급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지식과 문화의 확산을 도모했다.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와 과학 기술 발전, 문화예술 지원, 법률 개혁, 문물의 보급 등 다양한 업적을 통해 조선시대의 국가 발전과 국민 복지 증진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의 업적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서 귀중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

 

(4) 사육신

 

  세종대왕 사후 아들 문종은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았으나 즉위한 지 불과 2년 만인 1452년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은 것은 12살 아들 단종이다. 경혜비는 두 섭정 외에 단종의 수호자로도 지내 장군 김종서와 함께 왕권 강화를 꾀한 바 있다.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정부를 장악하고 1455년 조카를 스스로 폐위하고 제7대 조선왕이 되면서 세조라는 이름이 붙었다. 단종에 충실한 6명의 대신들이 단종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세조를 암살하려 하자 세조는 6명의 대신을 처형하고 망명지에서 단종도 죽였다. 세조왕은 정부가 정확한 인구수를 결정하고 효과적으로 군대를 동원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또한 국민 경제를 개선하기 위해 토지 조례를 개정하고 서적 출판을 장려했다. 무엇보다 왕조행정의 초석이 된 국정운영대법원을 편찬하고 국내 최초의 헌법형식을 서면형식으로 제공했다. 세조는 선대 세종과 문종이 공들여 두었던 집현전을 비롯하여 많은 현존하는 제도의 기반을 상당 부분 훼손하였다. 그는 자신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모두 삭감하여 장기적으로는 무수한 합병증을 일으켰다. 이러한 조정의 대부분은 발생하는 결과나 문제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힘을 위해서 이루어졌다. 그가 자신의 왕위 계승을 도운 대신들에게 보여준 편애는 정계 상층부의 부패를 키웠다.

 

(5) 체제 정비와 문화의 번영

 

  세조의 약자인 예종이 8대 왕으로 뒤를 이었으나 2년 뒤인 1469년 별세했다. 예산의 조카인 선종이 즉위했다. 그의 치세는 국가경제의 번영과 성장, 성종으로부터 궁중정치 입문을 권유받은 사림이라 불리는 신유학자의 대두가 특징이었다. 그는 유학자들로 구성된 왕립도서관과 자문위원회인 홍문관을 설립하여 철학과 정부 정책에 대해 논의하였다. 지리, 윤리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많이 출판하여 세종대에 버금가는 문화적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또 1491년 그의 전임자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북부 국경의 여진족에 대해 몇 가지 군사작전을 벌였다. 허종 장군을 중심으로 한 작전이 성공했으며, 패배한 여진족은 압록강 북쪽으로 후퇴했다. 성종은 1494년 아들 연산군이 뒤를 이었다.

 

(6) 사화

 

  연산군은 1498년에서 1506년 사이 문학적 숙청으로 통치된 조선 역사상 최악의 폭군으로 꼽히는 경우가 많다. 생모가 정현왕후가 아니라 폐비 윤씨임을 알게 되고 그의 행동에 이상을 보였다. 폐비 윤씨는 질투심에 성종의 후궁 중 한 명을 독살하고, 성종의 얼굴에 상흔을 남기며 독살을 강요 받았다. 어머니의 피로 얼룩진 옷을 보고 연산군은 윤씨를 고발한 성종의 후궁 2명을 때려 숨지게 하고, 이후 할머니 인수왕후를 밀어 죽였다. 그는 페비 윤씨의 죽음을 지지하는 관리들을 가족과 함께 처형했다. 그는 또한 세조의 왕위 탈취에 비판적이였다는 이유로 사림 학자를 처형했다. 연산군은 또 지방에서 온 1000명의 여성을 잡아 성균관을 개인적인 환락지로 만들었다. 그는 왕의 부적절한 행동과 정책을 비판하는 검열관과 홍문관을 폐지했다. 그는 일반인들이 한글을 국왕을 비판하기 위해 포스터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12년간의 잘못된 정치 끝에 그는 1506년 이복형제 중종을 왕위에 올린 쿠데타로 마침내 폐위되었다. 중종은 그를 왕위에 앉힌 사정 때문에 근본적으로 약한 왕이었지만 그의 통치시대에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인 조광조가 주도한 중대한 개혁의 시기도 있었다. 그는 지방자치제도인 향약을 설립하여 지방자치정신과 국민의 공동체정신을 강화하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보다 균등하게 분배하는 토지개혁으로 빈부격차를 줄이고 소유할 수 있는 토지와 노예수를 제한하고자 하였다. 관료의 수를 줄임으로써 정부의 규모를 축소하고자 했다. 조선시대 실록에 따르면 감찰관으로서 법을 엄격하게 적용했기 때문에 이 시기에 뇌물을 받거나 민중을 착취하는 공무원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은 민중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지만 중종을 왕위에 올리는 데 기여한 보수파 관리들에 의해 격렬하게 반대되었다. 이들은 중종으로 하여금 조씨의 충성심을 의심케 하는 음모를 꾸몄다. 조광조는 처형되었고, 이후 세 번째 숙청에서 그의 개혁 조치 대부분이 그와 함께 사라졌다. 50년 가까이에 걸쳐 조정의 정치는 왕자를 지지하는 파벌 간의 피비린내 나는 혼란스러운 투쟁으로 인해 엉망이 되었다. 왕실 사돈들 또한 큰 권력을 행사하여 그 시대에 많은 부패에 기여했다.

 

(7) 결론

 

  지금까지 조선 초기 시대의 주요 역사적 사건을 알아보았다. 다음 글에서는 조선 중기 시대의 주요 역사적 사건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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