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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한국사에 대하여 8. 현대사 [2] 미군정 시대 및 제 1공화국(1948-1960)

by melodic 2023.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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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 대하여

8. 현대사

[2] 미군정 시대 및 제 1공화국(1948-1960)

  이번에는 현대사에 속하는 미군정 시대와 제 1공화국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 미군정 시대 (1945-1948)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황제는 연합국 항복을 표명했다.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한(1945년 9월 2일 공식화 됨) 후 38선 분단은 소련군과 미군에 의한 남북 점령의 시작이다. 이 분단은 일시적인 것으로 미국, 영국, 소련, 중화민국의 신탁 통치를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탁 통치는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논의되었다. 1945년 9월 8일 미군은 인천에 상륙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군사정권을 수립하였고, 존 R 호지 중장이 정부를 담당했다. 국민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1945년 10월 호지는 한국자문위원회를 설립했다. 중국에서 운영해 온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통역 3명과 함께 대표단을 호지에게 보냈으나 그는 이들과의 면담을 거부했다. 마찬가지로 호지는 새로 결성된 조선인민공화국과 그 인민위원회를 승인하는 것을 거부하고 12월 12일에 그것을 금지했다. 1년 뒤 김규식과 이승만이 각각 이끄는 임시입법부와 임시정부가 설립되었다. 여러 가지 원인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경제적 혼란이 이 시기에 나라를 괴롭혔다. 일본 착취의 후유증은 북쪽과 마찬가지로 남쪽에도 남았다. 게다가 미군은 나라를 통치하겠다는 도전에 대해 거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언어나 문화, 정치 상황에 대해 거의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처럼 그들의 정책의 대부분은 의도하지 않은 불안정성 효과를 가져왔다. 북한으로부터의 난민이나 해외로부터의 귀국자의 물결이 이 혼란을 더욱 심화시켰습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한국의 미래에 대해 논의하는 회의가 개최되었다. 5년간의 신탁통치가 논의되고 미소공동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위원회는 서울에서 간헐적으로 모임을 가졌지만 정부 수립 문제로 교착상태에 빠졌다. 1947년 9월 미국은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유엔 총회에 한국 문제를 제출했다. 유엔총회 결의안은 한국에서 유엔이 주관하는 총선을 요구했으나, 북한이 이를 거부한 뒤 1948년 5월 남한에서 헌법제정의회 총선이 있었다. 헌법이 제정되어 대통령의 정치 형태를 정하고 임기는 4년으로 정해져 있었다. 헌법 규정에 따르면 7월에 간접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2) 제1공화국 (1948-1960)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1875 ~ 1965)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공식 수립되었고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다. 이 대통령의 정권 수립으로 새 정부에도 사법 주권이 전해졌다. 1948년 9월 9일 북한이 김일성 정권 하에서 선언되었다. 그러나 1948년 12월 12일 제3차 총회 결의 195에 따라 유엔은 대한민국을 한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했다. 1946년 북한은 사유재산과 친일인이 소유한 시설과 공장을 몰수하여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국유화했다. 남부의 토지 개혁 요구는 강해져 1949년 6월에 최종적으로 제정되었다. 땅이 넓은 한국인은 땅의 대부분을 포기할 의무가 있었다. 농가 전체의 약 40%가 소규모 지주가 되었다. 그러나 해방 전에 토지 소유자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선제권이 주어졌기 때문에 많은 친일 단체들이 재산을 취득하거나 보유하고 있었다. 나라가 분열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남북관계는 점점 적대적이 되었다. 1948년 소련군이 철수하고 북한은 미군을 추방하라고 한국을 압박했지만, 이 대통령은 자신의 정부를 미국과 강하게 연결시켜 북한과 일본 모두에 맞서려고 했다.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위한 협의가 이뤄졌지만 성과는 거의 없었다. 한편, 정부는 막대한 미국 원조를 받아들였고, 때로는 국가 예산 총액에 가까운 금액을 도입했다. 민족주의 정부는 또한 미군 정부의 많은 관행을 계속했다. 1948년 이 정부는 제주, 순천, 여수에서 군사 봉기를 진압했다. 반란과 그 진압 사이에 14,000명에서 6만 명이 모든 전투에서 살해되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리 대통령의 행정부는 반대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를 부각시킨 유명한 사건은 1948년 공산주의 음모로 박정희 대통령이 체포돼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이다. 제1공화국의 주요 정책은 반공산주의와 '북으로 확대됨으로써 통일'이었다. 한국군은 장비도 준비도 미흡했지만 이 정권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군사력으로 한국을 통일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차 총선에서는 과반수의 의석이 이 입장을 지지하지 않는 무소속 의원들에게 가서 지지 부족과 취약한 국가 상태를 확인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한을 침략했다. 미국 방위에 따르면 16명의 연정 하에서 처음으로 수집 활동을 했다. 민간인 사상자가 나왔다. 1950년 후반에 입북하면서 입북은 전투가 앞선 노선에 가까운 방향에 가깝다.1951년 7월 출범한 정전협상은 지난해 7월 27일 북한의 대북 제재협상은 현재 북한의 제재조치를 체결했다. 정전 후 한국 정부는 1953년 8월 15일의 상징일에 서울로 돌아왔다. 휴전 후 한국은 1960년 학생 반란으로 끝난 이승만의 독재적 리더십 아래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이승만은 정부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추가 조치를 강구하려고 했다. 이들은 1952년 전쟁이 진행 중이며 여전히 정부가 부산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그해 5월 이명박 대통령은 헌법 개정을 강행해 대통령직을 직접 선출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반대파 국회의원과 시위대, 반정부 단체 등을 체포했다. 이승만은 그 후 큰 차이로 선출되었다. 1954년 선거에서 의회의 지배권을 회복하고 이후 8년간의 임기 제한을 면제하는 수정안을 추진하여 1956년에 다시 재선되었다. 그 직후 이 정권은 야당 의원들을 체포하고 북한 간첩이라고 비난하며 처형했다. 정권은 정치의 장을 지배하면서 점점 억압적이 되었고 1958년에는 국가보안법을 개정하여 지방자치단체를 포함한 모든 수준의 행정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강화하고자 했다. 이들 조치는 국민 사이에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지만 여론의 거센 항의에도 불구하고 이 정권은 1960년 3월 대선을 조작해 압승했다. 이 날 마산시에서는 선거 부정에 대한 학생들과 시민들의 항의가 쇄도했다. 당초 이들 시위는 현지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마산항에서 학생 시신이 떠 있는 것이 발견되자 전국적으로 분노하여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4월 19일 여러 대학과 학교 학생들이 이른바 4월 혁명으로 불리는 서울 거리에서 시위 행진을 벌였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불러들여 발포로 군중을 진압했다. 이후 전국적인 항의는 정부를 뒤흔들었고, 4월 25일 대학교수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위가 격화된 뒤 리는 4월 26일 정식 사표를 제출하고 망명했다.

 

(3) 결론

 

  지금까지 미군정 시대의 특징과 제 1공화국에 대해 서술해보았다. 다음 이어지는 글에서는 제 2공화국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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