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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한국사에 대하여 8. 현대사 [4] 제 2공화국 (2)

by melodic 2023.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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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 대하여

8. 현대사

[4] 제 2공화국 (2)

  이번 글에서는 제 2공화국의 역사 중 5.16 군사정변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5·16 군사 쿠데타는 1961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한 박정희와 그 동맹국들에 의해 조직되어 실행된 쿠데타이다. 이 쿠데타는 장명 총리와 윤보순 대통령의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무력화시켜 제2공화국을 끝내고, 7월 장 장군 체포 이후 위원장을 지낸 박 전 대통령이 사실상 이끄는 개혁파 군사국가재건최고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쿠데타는 박 대통령의 지도 아래 새로운 개발주의 엘리트들을 집권시켜 한국의 급속한 산업화 기반을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됐지만 그 유산은 민주주의와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이후 제정된 숙청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박 대통령과 동맹국들의 5.16 군사혁명을 새로운 성숙한 국민정신의 데뷔라고 칭하며 쿠데타 혁명으로서의 성격에 대한 논란이 있다.

 

(1) 배경과 원인

 

  쿠데타의 배경은 그 직접적인 맥락과 해방 이후 남한의 발전이라는 점에서 분석할 수 있다. 제2공화국의 경제적, 정치적으로 극히 문제가 있는 상황이 군사개입을 조장했음에도 쿠데타의 근원은 이승만 시대 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학자들은 쿠데타가 불안정하고 마비된 새 정부의 변덕 때문이라는 일반적인 시각은 너무 단순하다고 주장한다.

 

- 이승만 정권하의 한국

 

  1948년부터 한국은 대한민국의 정치권력 독점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한국전쟁을 이용한 반공산주의자 이승만 대통령이 통치했다. 이씨는 미국 점령하에서 영향력 있는 지위에 오른 이른바 해방귀족으로 불리는 보수적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표했다. 이런 해방귀족들은 이 후보 지지자와 민주당 내 경쟁자를 포함해 정치계층의 대부분을 형성하면서 이 후보와 거의 같은 사회적 비전을 추진했다. 이 후보는 1956년 대선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선거운동을 한 조봉암 후보의 사형집행 등 실질적인 반대세력을 배제했다. 그러나 조씨와 같은 중요한 반대파 인사들조차도 전통주의자인 유교적 세계관에 의존했던 지배계급의 폭넓은 보수적 합의의 일부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것은 부권주의적인 정부의 가치와 광범위한 정치적 후원 네트워크의 힘을 지지했다. 이러한 전통주의 모델 하에서 이씨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고령자'이며 한국인이 가족에게 충성을 다하게 되었고, 이러한 관계는 이씨와 지배층의 사람들을 연결시킨 의무적인 유대에 의해 강화되었다. 해방귀족 통치의 결과 중 하나는 인근 일본과는 현저한 대조를 이루는 한국의 발전 정체였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이 집중적으로 발전해 온 곳에서 이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정체되고 가난하며 대부분 농경적인 한국 경제를 발전시키려는 큰 노력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의 발전 부족은 사회의 근본적인 구조조정과 철저한 정치·경제 재편을 요구하는 민족주의적 지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지적 반응은 정치적 성향이 모호한 이후의 지도자 박정희가 영향을 많이 받았다.

 

- 제2공화국의 사회와 경제 문제

 

 1960년 3월 부정선거 이후 항의운동은 4월 혁명으로 발전했고, 이 대통령은 미국의 압력을 받아 4월 26일 평화적인 사임을 강요받았다. 이 당선인이 빠지면서 제2공화국을 수립하는 새 헌법이 공포되었고, 6.29 입법선거는 민주당의 압승으로 이어졌다. 이 당선인의 자유당은 새로 구성된 중의원에서 불과 2석에 그쳤다. 제2공화국은 의회제도를 채택해 대통령을 국가원수로 하고 행정권은 사실상 총리와 내각에 부여됐다. 민주당 윤보선 씨는 8월에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장명 전 부통령이 총리에 취임했다. 제2공화국은 처음부터 문제에 직면해 있었고 민주당의 격렬한 파벌주의가 정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집념 깊은 민중 불안과 경쟁했다. 한국 경제는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높은 실업률 아래서 악화되어 범죄율은 2배 이상으로 상승했다. 예를 들어 1960년 12월부터 1961년 4월까지 쌀값은 60% 상승한 반면 실업률은 23%를 웃돌았다. 대규모 식량 부족이 생겼다. 반면 민주당의 '새 파벌'을 대표하는 장명은 불과 3표 차이로 총리에 선출되었다. 이씨의 임명자 숙청은 장면이 부유한 사업가와 권력 있는 장군을 우대하기 위해 용의자 명단을 조작함으로써 대중의 눈에는 효과가 없었다. 이 후보자는 해임되고 민주적 헌법이 제정됐지만 해방귀족은 여전히 권력을 유지해 한국이 직면한 문제의 악화는 새 정부로서는 극복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났다. 남한 정치의 붕괴와 군을 괴롭힌 행정 숙청이 겹치면서 군내 지휘계통 유지와 예속 근절을 담당했던 군사보안사령부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좌절시켰다. 군사보안사령부가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쿠데타 계획이 전개되었고, 제2공화국의 문제는 쿠데타가 조직되고 실현될 수 있는 맥락을 제공했다.

 

- 군대의 파벌주의

 

  쿠데타의 길을 터주는 직접적인 요인은 당시 60만 명의 병사를 거느린 세계 최대 규모의 한국군 자체의 파벌주의였다. 군대는 일본군과 이후 미군의 이중훈련을 통해 많은 대원들이 받은 독특한 정체성을 부여받았다. 개혁파 하급 장교들은 상급대장들을 당 정치에 의해 타락한 것으로 보았고, 625전쟁의 급속한 확산 이후 육군 상급사령관의 위상이 공고해진 데 따른 승진 병목현상이 문제를 가중시켰다. 군대는 또한 지역선을 따라 같은 학교를 졸업한 장교 파벌로 나뉘어져 있다. 후자 중 가장 영향력이 컸던 것은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신경만주사관학교를 각각 졸업한 경쟁파벌이며 해방 후 한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계급별로 하위 계급 장교가 많았다. 박정희는 3개 기관에 모두 참석하여 군 고위 지휘관과 젊은 파벌 사이에 광범위한 관계를 맺고 쿠데타 연합을 이끄는 독특한 위치에 있었다. 이 정권이 붕괴되고 제2공화국이 수립된 후 육군사관학교 동창들를 중심으로 개혁파들은 1960년과 1956년 대선 부정조작에 가담한 책임을 묻기 위해 고위 지휘관을 소집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소장은 5월 2일 개혁파 지지를 선언하고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의 사퇴를 요구하여 주목을 받았다. 최용희 합참의장에 대하여 선배들에 대한 반란으로 알려진 사건으로 사퇴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 시점에서 쿠데타 초기 계획은 이미 진행되고 있으며, '선배들에 대한 반란'에 의해 가속화되었다.

 

(2) 정변 계획 및 조직

 

- 중앙 조직 군사

 

  쿠데타의 최초 계획은 이른바 5월 8일 계획으로 1960년 5월 8일 쿠데타를 전개할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1960년 초 박 전 대통령을 비롯한 개혁파 장교들에 의해 논의되고 수립된 것으로 이 대통령의 자리를 내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 계획은 아이디어 이상으로 크게 움직이지 않았고 곧 4월 혁명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1960년 5월부터 10월까지 다양한 장교들을 모아 쿠데타 계획을 세웠는데, 이는 주로 만주 육사 졸업생들과의 유대에 기반한 것이였다. 그는 또한 쿠데타 선전 기반을 확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부산일보 편집자들의 충성심도 확보했다. 박 대통령은 10월까지 핵심 9명을 모아 측근인 김종필 국방위원장에게 비서관 역할을 맡겼다. 박 대통령은 11월 우연히 부산에서 서울로 옮겨 9일 서울 자택에서 만난 자리에서 군내 반부패 운동을 조종하기로 했다. 박 대통령은 또 다른 장군들의 쿠데타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는 데 집중하고, 다른 핵심 구성원은 젊은 장교를 채용해 서울 안팎에 혁명적인 세력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1961년 1월 12일 장도용의 설명에 따르면 박씨는 5월에 예비역 군인 153명의 명단에 올랐던 것으로 밝혀졌다. 역사학자 김형아는 대조적으로 장성택 육군참모총장이 쿠데타를 정치적으로 은폐하기 위해 박 전 대통령의 해임이 임박했다는 소문을 일부러 퍼뜨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한 박 전 대통령이 권력자들로부터 특별한 도움을 받은 것은 명백하다고 결론지었다.

 

- 즉각적인 준비 과정

 

  그 후 반년 동안 쿠데타 계획은 군내에서 공공연하게 비밀로 유지되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육군 대정보사령부와 기갑 9사단 획득에는 실패했지만, 상급기관에 보고되지 않아 계획을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1960년이 끝나감에 따라 박 대통령은 핵심 그룹 밖에서 평행회담을 시작하며 자신의 계획에 대한 지지자들의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전군의 지지를 얻기 위해 혁명평의회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1961년 3월 핵심세력은 서울 충무장식당에서 만나 쿠데타 날짜를 4월 19일로 정했고, 이것은 이승만 정권을 전복시킨 혁명기념일이라는 점에서 큰 파장이 예상되었다. 박 대통령은 또한 저명한 기업인의 자금 지원을 확보했다. 마지막으로 1961년 4월 10일 박 대통령은 스스로 계획의 세부 사항을 밝히기로 했다. 장씨의 이후 반응은 쿠데타를 일으키는 결정적인 것이었다. 그는 제안된 지도자의 지위를 거절했지만 계획을 민간 정부에 알리지 않았고 공모자 체포도 명령하지 않았다. 이로써 박 대통령은 장성택을 쿠데타 조직을 지도하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만들었다. 4월 19일 날짜는 예상되는 혼란 없이 지나갔고 계획자들은 5월 12일 쿠데타를 다시 계획했다.

 

- 5월 12일 쿠데타 실패와 비상 계획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5·12 계획이 군 보안부대에 잘못 유출되어 장명 총리와 현석호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되었다. 장명은 장도연 육군참모총장의 개입으로 인해 조사를 의뢰하는 것을 만류당했고, 그는 보안보고서를 신뢰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군사 쿠데타가 임박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는 것도 장명의 결정에 기여하여 5월 12일 계획에 대한 보고는 오보로 처리되었다. 쿠데타 조직은 5월 12일 계획을 중지하고 5월 16일 오전 3시에 새로운 마지막 날짜를 수정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3) 사건의 전개 과정

 

  이 음모는 5월 16일 이른 아침에 다시 누출되었고, 이번에는 즉시 행동을 취했다. 대정보사령부는 반란이 진행 중이라며 경계를 호소했고 용의자를 검거하기 위해 헌병대가 파견되었다. 박 대통령은 쿠데타 작전을 개인적으로 통제하고 계획을 철회하기 위해 제6지구군 사령부로 이동했다. 박씨는 모인 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우리는 민간 정부가 그 나라에 질서를 되찾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총리와 각료들은 부패의 늪에 빠져 나라가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우리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정부에 대항한다. 우리는 유혈 없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이 혁명군에 가담하여 나라를 구하자. — 박정희 연설은 대성공이었고 반란군을 체포하기 위해 파견된 헌병대조차 그들의 대의를 저버렸다. 6군이 장악한 상황에서 박 대통령은 김재춘 대령을 뽑아 서울 점령의 선봉대를 조직하고 장도용에게 쿠데타에 단호히 참여하거나 문민정부와의 창당 결과를 감수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후 특전사를 향해 한강을 건너 청와대 관저를 점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한편 포병여단이 중앙군사령부를 점령하고 한반도 북부의 서울 도심을 확보했다. 오전 4시 15분경 한반도 다리를 지키던 충성파 헌병대와 짧은 총격전이 끝난 뒤 박 씨의 부대는 3개 정부 부처 행정청사를 점거했다. 그들은 조선방송 본부를 점거하고 군사혁명위원회의 권력탈취를 선언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군사당국은 지금까지 분쟁을 회피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 자제할 수 없었다. 정부의 3개 부문을 완전히 장악하고 군사혁명위원회를 설립하기 위해 이날 새벽 공동작전을 개시했다.

 

군이 이 반란를 일으킨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 나라와 국민의 운명을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과 정치인에게 맡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 우리는 위험한 길을 잃은 우리나라에 방향을 제시할 때가 됐다고 믿는다.

 

 군사 혁명 위원회 방송은 이어 반공주의, 대미관계 강화, 정치부패 척결, 민족경제 자율화, 통일, 현 세대 정치인 제거 등 쿠데타 정책 목표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장도용 위원장 명의로 발표됐지만 이는 사전 승인 없이 이뤄졌다. 날이 밝고, 김윤근이 이끄는 해병대 부대가 한강을 건너 청와대를 장악했다. 민간 정부는 급속히 붕괴했다. 장명 총리는 쿠데타 소식을 듣고 서울을 떠났고,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윤씨는 1963년까지 명목상 국가원수로 계속 일했지만 유효한 권력은 모두 박탈되었다. 이한림 제1군 사령관은 쿠데타 진압을 위해 예비군을 동원할 준비를 하다가 북한 공격 기회를 막기 위해 후퇴했다. 그는 이틀 후에 체포되었다. 20개의 중무장 사단이 현재 서울에서 쿠데타를 지지하며 진압의 현실적 가능성을 막았다. 사흘간의 잠복 끝에 장명은 다시 모습을 드러내 내각 총사퇴를 발표하고 신군부에 권력을 이양했다. 육군사관후보생은 쿠데타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거리를 행진했다. 장도용 위원장은 현재 위원장에 임명돼 필요한 최종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렇게 5월 16일 쿠데타는 끝나게 된 것이다.

 

(4) 여파

 

- 통합과 권력 투쟁

 

  쿠데타가 완료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새 정부의 통합 사업이 시작되었다. 계엄령은 즉시 시행되었다. 5월 20일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평의회(SCNR)로 개칭되었고, 다음날 새로운 내각이 출범했다.위원장을 지낸 장 장군은 육군참모총장으로 남아 있다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의 직무도 겸임하여 정식 행정부장에 취임하였다. SCNR은 당초 14개 소위원회에 배치된 30명의 최고위 군관의 군사정권으로 공식화돼 법률을 공포하고 각료를 임명하며 행정 전체의 기능을 감독할 권한을 포함한 광범위한 책임을 졌다. 그러나 새 내각의 헌법은 치열한 내부 권력투쟁의 대상이 되었고 이후 두 달간 박 대통령은 급속히 권력을 자신의 손에 넘겨주게 된다. SCNR은 6월 6일 국방부 장관과 육군 참모총장직을 박탈한 국가재건특별조치법을 공포했다. 이 법안의 대부분은 장성택을 배제하기 위해 박 당선인의 지시로 활동하던 이석채 의원이 기초한 것이다. 나흘 뒤인 6월 10일 국가재건법 최고위원회가 통과돼 SCNR 부위원장이 상임위원장이 될 것을 명시했다. 결국 7월 3일 장 씨 자신이 반쿠데타를 기도한 혐의로 체포되고 6·10법이 개정되면서 박 씨는 SCNR과 상임위원회 의장직을 겸직할 수 있게 됐다.

 

- 미국의 반응

 

  쿠데타 지도자들의 당면 과제 중 하나는 새 정부에 대한 미국의 승인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 승인은 5월 20일에 대통령 존 F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케네디 대통령은 양국 간 우호관계를 확인하는 메시지를 SCNR에 보냈기 떄문이다. 카터 B. 유엔군 사령부의 매그루더 사령관은 작전 지휘권 반환을 동시에 발표했다. 5월 27일까지 쿠데타 지도자들은 미국의 지지에 자신감을 갖고 쿠데타 당일 부과했던 계엄령을 해소했다. 6월 24일 사무엘 D. 미국 대사인 버거가 서울에 도착해 미국이 자국 정부를 공적으로 지원하는 데는 관심이 있지만, 숙청과 비난 중단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침내 7월 27일, 국무장관 딘 러스크는 기자회견에서 SCNR 정부에 대한 미국의 공식 승인을 발표했다.

 

 (5) 평가

 

  5.16 쿠데타는 1993년까지 어떤 형태로든 계속되는 일련의 군사정권의 출발점이었다. 박 대통령의 실질적 후계자인 전두환 전 대통령의 12.12 쿠데타와 5.17 쿠데타에도 전례가 있었다. 1980년 이후 박 대통령 아래 연합야당이 발전하고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발전하면서 쿠데타는 김대중 등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아 많은 논쟁거리가 되었다. 쿠데타를 우리나라 최초의 진정한 민주주의 정부를 무너뜨린 부당한 폭동행위로 보았다. 그러나 쿠데타 이후 급속한 산업화와 박정희 정권의 부패하지 않는 성격 등의 긍정적 유산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6) 결론

 

   이와 같이 5.16 군사정변의 배경, 전개 과정 및 여파와 평가에 대해 알아보았다. 다음 이어지는 글에서는 제 3공화국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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