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 대하여
시대적 흐름에 따른 각 나라에 대한 고찰
1. 고구려
이번 글에서는 고구려의 군사, 대외 관계, 그리고 유산 및 언어에 대해서 소개해보고자 한다.
(1) 군사
고구려는 매우 군국주의적인 국가였다. 고구려는 한국 학자들에 의해 제국으로 기술되어 있다. 처음에는 추기경의 지시에 따라 4개의 부분적으로 자치구가 있었고 군주가 이끄는 중심지구가 있었으나 1세기에는 추기경의 관할이 되었고, 3세기 말까지 중앙지구에 의해 중앙집권화 관리되었다. 그들은 군주에게 정치적 군사적 권위를 모두 잃었다. 4세기 고국원 시절 시안병위와 백제에 패한 뒤 소수림은 광개토 정복의 길을 열어주는 군사개혁을 단행했다. 고구려는 전성기에 30만 명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다. 고구려는 종종 마오쩌둥족과 같은 반유목민 가신을 보병으로 징발했다. 고구려의 모든 사람들은 병역을 의무화했거나 곡물세를 추가로 납부함으로써 징병을 피할 수 있었다. 당나라의 668건의 논문에는 보장 항복 후 총 67만5000명의 피난민과 176명의 군포로가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에서 사용된 주요 발사체는 활이었다. 활은 보다 복합적이 되어 석궁과 동등하게 던질 수 있도록 개조되었다. 돌을 던지는 기계나 석궁도 사용되었다. 기병대에 사용되고 개방적인 순서로 사용된 장대는 대부분 창이었다. 두 종류의 검이 고구려 무사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첫 번째는 주로 던지기에 사용되는 짧은 양날의 변종이었다. 다른 하나는 한의 영향을 최소화한 더 긴 외날의 검이었다. 헬멧은 중앙아시아 사람들이 사용하는 헬멧과 비슷했고, 날개, 가죽, 말꼬리로 장식되어 있었다. 방패는 병사의 몸의 대부분을 덮고 있던 주요 보호물이었다. 기병대는 개마무사로 불리며 카타플락트와 비슷한 형태였다. 고구려는 환두대도라는 칼을 사용했다. 조선의 검은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바뀌었고 검의 형태도 변화했다. 고대 한국의 철검, 특히 가장자리에 반지가 있는 칼에는 고고학적 발견이 많다.
1) 요새화
고구려 요새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강과 지류 사이에 위치한 달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해안 간 홈과 지상벽이 여분의 방어선을 형성했다. 성벽은 그 길이가 넓고 점토로 고정된 거대한 돌 블록으로 축조되어 있어 중국 포병들조차 이를 돌파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벽은 지하 공격을 막기 위해 홈으로 둘러싸여 있고 가드 타워가 장착되어 있었다. 모든 요새에는 오랜 포위에 충분한 수자원과 장비가 있었다. 강이나 산이 없으면 방어선이 추가되었다.
2) 조직
고구려 병사들에게 고도의 개인훈련을 주기 위해 왕이 직접 지휘하는 1년에 두 번의 수렵훈련과 기동훈련, 수렵조작, 퍼레이드가 이루어졌다. 수도에는 5개의 군대가 있는데, 주로 기병대가 왕으로 이끌었으며, 그 수는 약 1만 2500명이었다. 군부대의 수는 2만1000명에서 3만6000명까지 다양하며 지방에 위치하여 주지사가 지휘하였다. 국경 근처의 군사 식민지는 대부분 병사와 농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귀족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사병도 있었다. 이 제도를 통해 고구려는 추가 비용 없이 5만 명의 군대를 유지·활용할 수 있었고, 특별한 경우에는 대규모 동원을 통해 30만 명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다. 고구려 부대는 창병, 도끼병, 도보와 말로 구성된 궁병, 장갑과 중창사단을 포함한 중기병으로 나뉘었다. 투석기, 암벽 등반, 폭풍 부대 등과 같이 특별한 부대도 있었다. 이 기능구분의 이점은 고도로 전문화된 전투부대이며 단점은 한 부대가 복잡하고 전술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3) 전략
군대 편대에는 장군과 그 참모들이 군대 중앙에 호위를 두고 있었다. 사수들은 도끼병에 의해 방어되었다. 장군 앞에는 주요 보병부대가 있었고 측면에는 적의 측면 공격에 대비해 반격할 수 있는 중기병대가 늘어서 있었다. 전방과 후방에는 경기병대가 있어 정보와 추적, 적의 공격을 약화시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주요 부대 주변에는 중기병과 보병의 작은 그룹이 있었다. 각 부대는 상호 지원을 함으로써 상대를 보호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고구려는 도시를 기반으로 한 적극적인 방어 전략을 펼쳤다. 이 적극적인 방어체계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와 요새화된 캠프 외에도 소규모 경기병 부대를 사용하여 적과 봉쇄해제 부대, 그리고 최정예 병사로 구성된 강력한 예비군을 끊임없이 공격해 왔다. 고구려는 또한 군사 정보와 특수 전술을 전략의 중요한 부분으로 사용했다. 고구려는 철기시대 중국 궁정에 돌창만 올리는 등 허보에 능했다. 고구려는 스파이 시스템을 개발했다. 삼국시대에 언급된 대표적인 스파이 중 한 명인 백석은 신라 화랑에 잠입할 수 있었다.
(2) 대외 관계
고구려의 군국주의적 성격은 종종 중국 왕조와의 충돌을 일으켰다. 중국과 전쟁을 하지 않던 시절 고구려는 무역과 불가침조약 형태로 중국 왕조 일부에 공물을 보내기도 했다. 이러한 교류 활동은 중국에서 한반도로의 문화적, 종교적 흐름을 촉진했다. 고구려는 또 다른 한국 왕국과 인근 부족 국가들로부터 공물을 받아 자주 말갈인들을 군대에 동원해 왔다. 백제와 고구려는 신라와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동맹을 맺으면서도 역사적으로 지역 경쟁을 유지해 왔다.
(3) 유산
평양의 고구려 고분군 고화를 비롯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만주지역에서 성벽으로 둘러싸인 읍성, 궁궐, 무덤, 유물 등이 발견되었다. 현재의 중국에서도 예를 들어 현재의 북한과의 국경에 있는 랴오닝 성 화엄련 인근의 절봉산성이 있었을 것으로 의심되는 은뉴 산에서 몇몇 유적이 여전히 보인다. 또한 중국 학자들이 광개토와 그 아들 장수의 무덤으로 여기는 것을 비롯하여 5세기 이전 고구려사의 주요 자료 중 하나인 광개토비도 많이 소장되어 있다.
1) 세계 유산
유네스코는 2004년 세계유산에 현재의 중국 고도와 고구려 왕국의 무덤과 현재의 북한 고구려 고분군을 추가했다.
2) 이름
현대의 영문명 코리아는 고려(고려라고도 표기)가 고구려의 정통 계승자로 자리매김한 데서 유래했다. 고려라는 이름은 5세기 장수시대에 처음 사용된 것이다. 고구려는 서기 520년 이후 중국과 일본의 역사적 외교적 자료로 고려라고도 불란다.
(4) 언어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어 단편을 바탕으로 고구려가 보유하고 있던 지역을 복원하려는 학술적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언어학적 증거로서의 신뢰성에 대해서는 아직 논쟁 중이다. 삼국사기 지명 주석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출처는 한국어, 일본어, 또는 양자의 중간어로 해석되고 있다. 알타이어나 퉁구스어를 포함하는 것도 널리 검토하고 있다. 중국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부여, 동옥저, 고조선의 언어는 비슷하지만 말갈어와는 다르다.
(5) 결론
지금까지 고구려의 군사, 대외 관계, 유산 및 언어에 관해 살펴보았다. 다음은 백제라는 나라의 특징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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