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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한국사에 대하여; 시대적 흐름에 따른 각 나라에 대한 고찰 2. 백제 [1] 역사

by melodic 2023.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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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 대하여

시대적 흐름에 따른 각 나라에 대한 고찰

2. 백제(기원전 18년~서기 660년)

  이번 글에서는 백제라는 나라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백제의 역사적 특징에 대해서 소개해 보려고 한다. 기원전 18년부터 서기 660년까지 조선 남서부에 있던 왕국이다. 고구려, 신라와 함께 삼국시대의 하나였다. 삼국이 따로 존재하는 동안 백제의 인구는 약 380만 명(76만 가구)으로 고구려(350만 명)와 비슷했고 신라(85만 명)보다 훨씬 많았다. 백제는 고구려의 창시자인 주몽과 소소노의 셋째 아들 옹조가 위례성(현재의 서울 남부)에서 건국했다. 백제는 고구려처럼 고조선이 멸망할 무렵 현재 만주에 건국된 국가인 부여를 계승했다고 주장했다. 백제는 삼국이 한반도를 지배하게 되면서 고구려나 신라와 번갈아 싸우면서 동맹을 맺었다. 백제는 4세기 성수기에 평양까지 서한반도의 대부분을 지배했으며 요서 등 중국에 영토를 가졌을 가능성도 있다. 중국이나 일본과의 정치·무역 관계를 맺어, 지역의 중요한 해양 대국이 되었다. 그 항해 기술은 동아시아의 페니키아가 되었고 불교를 동아시아 전체에 전파하고 대륙 문화를 일본에 전파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660년 당나라와 신라에 패하여 결국 통일신라에 넘겨지게 되었다.

 

(1) 창립

 

  백제는 고구려와 부여의 한족과 예맥족이 중심이다. 낙랑사령부 출신들이 무역과 정복을 통해 들어오고 소수의 진도 백제 정치에 진출하기도 한다. 백제는 기원전 18년 고구려에서 한강 유역에 이르는 사람들을 이끌던 온조왕에 의해 세워졌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삼한시대에는 마한동맹의 주요 국가 중 하나가 이미 백제라고 불렸다. 삼국사기는 백제의 건국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주몽은 고구려를 건국하기 위해 그 왕국을 떠났을 때 아들 유리를 부여에 남겨두었다. 주몽은 동명왕이 되어 소서노, 옹조, 비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두었다. 그 후 유리가 고구려에 도착하자 주몽은 곧 그를 황태자로 삼았다. 유리가 다음 왕이 될 것을 깨닫고, 서선호는 고구려를 떠나 두 아들 비류와 옹조를 데리고 남쪽으로 가서 10명의 가신과 함께 자신들의 나라를 세웠다. 그녀는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에 중요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온조는 위례성(현재의 하남)에 정착하여 나라를 십가신이라 부르고 비룡은 가신의 충고를 어기고 미추홀(현재의 인천)에 정착했다. 미추홀의 짠물과 늪지는 정착을 어렵게 했지만 위례성 사람들은 잘 살고 있었다. 그 후 비룡은 동생 옹조에게 가서 시페의 왕좌를 구했다. 옹조가 거부하자 비류는 선전포고를 했으나 패배했다. 치욕 속에 비룡은 자살하고 백성들은 위례성으로 옮겨갔고, 그곳에서 온조왕이 이들을 환영하면서 국명을 백제(백가신)로 개칭했다. 온조왕은 수도를 한강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옮겼고, 그 후 아마도 지금의 서울 내에서 다른 마한주의 압력을 받아 다시 남쪽으로 이동했다. 개루왕은 132년 서울 북서쪽에 있는 북한산성(지금의 고양시 북한산)으로 수도를 옮겼다. 초기 수 세기 동안 원삼국 시대라고 불리기도 했던 삼국시대 초기의 백제는 점차 다른 마한족을 지배하게 되었다.

 

(2) 영토 확장

 

  마한동맹에 속한 백제는 먼저 한강 유역을 통합한 뒤 지배국인 목지국을 타도하고 마한을 영토국가로 통합했다. 고정왕 치세(234~286년)에 백제는 마한동맹을 계속 공고히 하여 본격적인 왕국이 되었다. 249년 일본 고서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의 세력 확장은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동쪽 가야연맹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백제는 345년에 중국 기록에서 처음으로 왕국으로 기술되었다. 백제 최초의 외교사절단은 367년경 일본에 도착하였다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백제 영토를 확장하고 남쪽에 남아 있는 마한사회를 병합했다. 백제의 영토는 근동한반도(평안2성 제외)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371년 백제는 평양에서 고구려를 꺾은 적이 있다. 백제는 고구려와 실질적인 교역을 계속하면서 중국의 문화와 기술을 적극 수용했다. 불교는 384년에 정식 국가 종교가 되었다. 또한 백제는 바다의 강국이 되었고 고분시대 일본 통치자들과의 우호관계가 지속되면서 대륙문화의 영향력을 일본에 전파하였다. 중국의 문과, 불교, 선진 도자기, 의식 매장 등의 문화는 귀족과 장인, 학자, 승려들에 의해 관계를 통해 소개되었다. 그동안 한강 유역은 나라의 심장부로 남아 있었다.

 

(3) 웅진 시대

 

  5세기 백제는 고구려 남하의 군사적 위협을 받아 퇴각했고, 475년 서울 지역이 고구려에 함락된다. 백제의 수도는 475년부터 538년까지 웅진(현재의 공주)에 있었다. 산악지대에 고립된 신수도는 북쪽으로부터 안전했지만 외계로부터도 단절되어 있었다. 그러나 위례성보다 신라에 가깝고 고구려에 맞서 신라와 백제 사이에 군사동맹이 성립되었다. 삼국 시대 대부분의 지도에는 백제가 웅진·사비 시대에 국가의 핵심인 충청도와 전라도를 점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사비 시대

 

  538년 성왕은 수도를 사비(현재의 부여군)로 옮기고 나라를 강성국가로 재건했다. 한시적으로 국가의 정식 명칭을 남부여로 변경하였다. 백제가 그 기원을 추적한 부여이다. 사비 시기에는 불교의 발전과 함께 백제문화의 개화를 목격하였다. 북쪽으로는 고구려, 동쪽으로는 신라의 압력을 받았고 성씨는 백제와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려고 했다. 항행 가능한 금강에 위치한 녹은 중국과의 접촉을 더욱 용이하게 했으며 무역과 외교가 모두 그의 통치하에 번성하여 7세기까지 계속되었다. 7세기 한반도 남부와 중부에서 신라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백제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5) 쇠퇴와 부흥 운동

 

  660년 신라와 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면서 백제는 고구려와 동맹관계에 있었다. 논산 인근 황산벌에서는 계백 장군이 이끄는 병력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곧 수도 사비가 함락되고 신라에 의해 백제가 병합되었다. 의자왕과 그의 아들 부여영은 중국으로 망명했고 지배계급 중 적어도 몇 명은 일본으로 도망쳤다. 사비의 몰락은 신라 당나라 동맹에 사로잡히지 않고 사비 인근 절벽에서 투신해 자살한 백제 궁녀와 후궁, 여인들이 수없이 많아 한국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사건 중 하나가 되었다. 이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백제의 패배와 벼랑에서 뛰어내린 궁녀 대장금의 맹세를 기리는 이른바 낙화바위에 파빌리온이 서 있다. 백제군은 단기간의 복원운동을 시도했지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직면했다. 도진 스님과 전 백제 장군 부여 복신이 일어나 백제를 되살리고자 했다. 이들은 백제 왕자인 부여풍이 일본에서 돌아와 왕이 되는 것을 환영하며 주루(충남 서천군)를 본부로 했다. 그들은 당나라 장군 류롄을 사비성으로 포위했다. 고종은 이익부를 공격했기 때문에 평민계급으로 강등된 류롄의 장군을 구원군으로 보냈고 류롄의와 류롄은 백제 저항세력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었지만 반란을 진압하기에는 역부족으로 한동안 군대가 교착상태에 있었다. 백제는 일본의 원조를 요청했고, 풍왕은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로 돌아왔다. 일본에서 온 배가 도착하기 전에 그의 부대는 웅진현에서 당군과 싸웠다. 663년 백제 부흥군과 일본해군 함대가 백제 남부에 집결하여 백강 해전에서 신라군과 대치했다. 당나라는 또 7000명의 병사와 170척의 배를 파견했다. 663년 8월 백강에서 벌어진 신라와 당의 연합함대가 각각 승리한 5차례의 해전을 거쳐 금강 또는 동진강 하류로 간주해 신라-당군이 승리했고 부여 풍은 고구려로 달아났다.

 

(6) 결론

 

  지금까지 백제의 역사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백제의 정부, 군사, 그리고 대외 관계의 특징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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