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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한국사에 대하여; 시대적 흐름에 따른 각 나라에 대한 고찰 7. 고려 [1] 고려 초기

by melodic 2023.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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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 대하여

시대적 흐름에 따른 각 나라에 대한 고찰

7. 고려

[1] 고려 초기

 

  이번 글에서는 고려라는 나라의 초기 역사에 대해서 소개해보고자 한다.

 

  고려는 후삼국시대로 불리는 918년에 건국되어, 1392년까지 한반도를 통일 지배한 한국의 국가이다.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했을 뿐만 아니라, 삼국시대 고구려에서 기원한 발해 북부왕국의 지배층을 많이 편입하였다. 그리하여 한국 역사학자들이 진정한 민족통일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한국'이라는 이름은 고려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개인적 정체성이 오늘날 한국적 정체성의 기초가 된 하나의 실체로 잘 융합된 것은 고려시대이다. 고려는 후고구려와 고구려의 후계국가였다. 고려는 통일신라와 함께 그 존재를 통해 한국에서 불교의 황금시대로 알려져 있었다. 국교로서 불교는 한국 역사상 최고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11세기에는 수도에만 70개의 사찰이 있었다. 고려에서는 상인들이 중동까지 오는 등 상업이 성행하였다. 현대의 북한 개성에 있는 수도는 무역과 산업의 중심지였다. 고려는 한국의 예술과 문화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시기였다. 고려는 전성기에 요나라와 진나라 등 북방제국과 끊임없이 싸웠다. 또한 원나라가 쇠퇴하자 몽골 원나라를 공격하여 영토를 개척하였다. 이는 고려의 북방영토 확장설로서 고구려가 과거 소유하고 있던 선조들의 땅을 되찾기 위한 것이였다. 고려는 교육과 문화를 중시했던 만큼 전시에는 상당한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14세기 황금기에 홍건적의 대규모 군대를 격퇴했다. 명나라에 대한 마지막 공격은 이성계 장군이 이끄는 쿠데타를 일으켜 고려 왕조를 종식시켰다.

 

(1) 건국

 

  7세기 후반 신라는 한국의 삼국을 통일하고 역사학에서 통일신라 또는 후신라로 알려진 시기에 접어들었다. 후신라는 삼국시대를 참고하여 백제와 고구려의 피난민을 통합하는 국가정책을 펼쳤다. 또한 새로운 중앙군인 구서당을 조직하여 신라인 3부대, 고구려인 3부대, 백제인 2부대, 말갈인 1부대로 나누었다. 그러나 백제와 고구려의 피난민들은 각자의 집단의식을 유지하면서 신라에 대한 깊은 원망과 적의를 계속 갖게 되었다. 후신라는 당초 200년간 단 한 차례의 외국 침략 없이 평화로운 시대였으며, 중동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국제무역을 하며 동아시아 해상지도력을 유지하였다. 8세기 후반 이후 신라는 수도의 정치적 난맥과 계급 제도의 경직으로 인해 불안정함에 따라 중앙 정부가 약화되고 지방 영주(호족)가 대두되었다. 무관 출신 견훤이 백제 난민 후손들과 함께 892년 백제를 되살렸고, 901년에는 당시 승려였던 궁예가 고구려 난민 후손과 함께 고구려를 되살렸다. 역사학에서는 이들 주를 후백제·후고구려라 부르며 후신라와 함께 후삼국 시대를 형성했다. 이후 고구려는 후신라 북부지역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는 북한 개성에 위치한 수도와 함께 고구려 난민들의 거점이었다. 고구려 난민 중에는 개성에 거점을 둔 저명한 해상 호족의 일원인 왕건이 있었다. 왕건은 후고구려가 성립되기 전인 896년 19세의 나이로 궁예 밑에서 군복무를 하면서 수년간 후백제에 대한 승리를 쌓아 국민의 신뢰를 얻었다. 특히 그는 해사 능력을 발휘하며 후백제 해안을 집요하게 공격하여 현대 나주 등의 요충지를 점령했다. 궁예는 불안정하고 잔혹했다. 905년에 그는 수도를 철원으로 옮겼고, 904년에 국호를 마진으로 바꿨으며, 911년에는 국호를 태봉으로 개칭했다. 여러 차례 연호를 바꿔 자신의 마음을 읽겠다고 하였으며, 많은 부하와 가족을 처형했다. 918년에 궁예는 자신의 장군들에 의해 폐위되고 왕건이 왕위에 올랐다. 이후 태봉이라고도 불렸던 고구려는 918년 고려를 건국한 고구려 귀족 가문 출신인 왕건에 의해 내부에서 멸망했다. 태조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왕건은 왕국의 이름을 고려로 바꿨고, 수도를 다시 개성으로 옮겼다. 그는 고려를 고구려의 후계자로 간주하고 만주를 정당한 유산으로 주장했다. 태조의 첫 법령 중 하나는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던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을 다시 점령하여 방어하는 것이었고, 이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2) 통일

 

  신라에 원한을 품고 있던 궁예와는 대조적으로 태조(왕건)는 약화된 왕국에 관대했다. 927년 후백제를 건국하면서 백제의 마지막 왕에게 복수하겠다고 다짐했던 견훤이 후신라의 수도를 약탈하고 왕에게 자살을 강요하고 왕 위에 꼭두각시를 놓았다. 태조는 현재의 대구 부근에서 견훤 손에 의해 대패하였고, 태조는 신성겸 장군과 김낙 장군의 희생으로 간신히 탈출하였다. 이후 백제는 후삼국의 지배적인 군사력이 되었다. 그러나 930년과 934년 후기 백제에 승리하였고, 935년 후기 신라가 평화적으로 병합되면서 세력 균형은 고려로 향했다. 태조는 신라 마지막 왕의 항복을 정중히 받아들여 후신라 지배계급을 편입시켰다. 935년에 견훤은 왕위 계승권 다툼으로 장남에 의해 쫓겨나 금산사에 수감되었다가, 3개월 만에 고려로 탈출하여 이전의 대적으로부터 예우를 받았다. 다음해 견훤의 요청에 따라 태조와 견훤이 8만 7,500명의 군사로 후백제를 정복하여 후삼국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고려는 935년에 후신라를 평화적으로 병합하고, 936년에는 후백제를 군사적으로 정복하여 한반도 통일에 성공한다. 고려는 고구려와의 연결고리가 공유되어 있는 발해인 대부분을 편입하여 그들의 왕족과 귀족 대부분을 받아들였다. 927년에 거란(요나라)에 의해 발해가 멸망한 후, 발해의 마지막 황태자와 지배층 대부분이 고려로 피난을 가서 태조로부터 따뜻하게 환영을 받고 땅을 주었다. 또한 태조는 고려왕실에 발해의 황태자를 포함하여 고구려의 두 후계국가를 통일하였다. 한국역사가들에 의하면 '진정한 민족통일'을 이루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제후들에 따르면 황태자와 동행한 발해난민은 수만 가구였다. 고구려의 후손으로서 발해인과 고려왕조가 관련이 있었다. 태조는 발해와의 사이에 '친척의 나라', '결혼한 나라'라는 강한 친족관계를 느껴 발해 난민을 보호하였다. 이는 발해와 적대관계에 있었던 후 신라와는 극명하게 대조되었다. 태조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족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나타냈다. 요나라는 942년에 50마리의 낙타와 함께 30마리의 사절을 파견하였는데, 태조는 사절을 섬으로 추방하고 다리 밑에서 낙타를 굶겼다 하여 '만부교 사건'이라 불리는 사건이 있었다. 태조는 후진의 고조에게 발해의 보복으로 거란족을 공격할 것을 제안하였다. 또한 후손들에게 거란족은 야수이며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발해 난민의 집단 탈출은 예종 때인 12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발해난민의 끊임없는 유입으로 고려의 고구려인 인구는 후삼국시대 이후 괴멸적인 전쟁을 겪은 신라와 백제에 비해 지배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삼국 시대 말기에는 신라인들이 거주하면서 '신라 고유'라고 생각했던 영토가 경주와 주변 가장자리로 축소되었다. 한편 고려의 수도 3군데 중 2군데는 개성과 평양으로 당초 패서지역과 발해에서 고구려인들이 거주하던 곳이다. 그러나 고려는 양국의 지배계급을 평화적으로 흡수하고 그 관료제 하에 편입시켜 정치적 결혼을 하고 각 나라에서의 지위에 따라 지위를 분배했다. 신라의 골품제와는 대조적으로 왕건이 실시한 이러한 개방정책으로 고려는 신라와 백제에서 온 관료와 기술자를 더해 더 많은 고도의 관료와 기술자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런 다음 그는 민족 정체성에 관한 하나의 의제를 설정했다. 또한 고려는 중세 중국과 탐라의 숙련 노동자들도 대량으로 받아들였다.

 

(3) 정치 개혁

 

고려는 한반도를 통일하였으나 호족 지역 영주들은 성벽 안에서 준독립적인 상태를 유지하여 군주제에 위협을 가했다. 태조는 정치적 동맹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유명한 호족 집안인 여성 29명과 결혼해 25명의 아들과 9명의 딸을 두었다. 넷째 아들 광종은 949년에 집권하여 군주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개혁을 실시하였다. 956년에 광종은 후삼국 시대 격동기에 호장에 예속되어 있던 포로와 난민을 해방시켜 지역 귀족의 세력과 영향력을 줄이고, 중앙정부의 과세 대상 인구를 늘렸다. 958년에 광종은 중국 귀화 관료인 장지의 조언을 받아 당나라의 왕실 시험을 토대로 과거시험을 치렀다. 이는 군주제의 권위를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의 개혁에 반대하거나 저항한 모든 사람들은 즉시 숙청되었다. 광종의 후계자인 경종은 976년에 광종의 개혁을 기초로 세워진 새로운 중앙정부 관료제도를 지원하기 위해 '시정전시과'를 제정했다. 다음 통치자인 성종은 정부의 중앙집권을 확보하여 중앙집권적 정치질서의 기초를 닦았다. 성종은 새로운 관료들로 채웠다. 그들은 과거 시험의 산물로 국가에 충성하는 교육을 받으며 중앙 임명된 관리들을 지방으로 파견했다. 그 결과, 군주는 의사결정의 대부분을 지배했고 중요한 결정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그의 서명이 필요하게 되었다. 성종은 유교를 지지하였고, 유학자 최승로의 제안에 따라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실시하였다. 또한 성종은 992년에 국자감 국립대학을 설립하여 태조가 이미 개성과 평양에 세운 학교들을 보완하였다. 또한 그는 수만 권의 책을 갖춘 국립도서관과 기록관을 설립하였다.

 

(4) 고려와 거란의 전쟁

 

  고려는 942년 만부교 사건에 이어 947년에는 정종이 30만 명 규모의 군 예비군을 창설했고, 광종이 청천강 이북에 요새를 건설해 압록강으로 향했다. 거란족은 고려를 잠재적 위협으로 여겼고, 긴장이 고조되며 993년에 고려를 침략했다. 조선인들은 거란족과의 첫 조우에서 패배했지만, 청천강에서 이들을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고려군 사령관 서희와 요군 사령관 샤소순녕 사이에 협상이 개시되었다. 결론적으로 고려는 요나라와 명목상의 속국 관계에 들어가 송나라와 인연을 끊었고, 요나라는 압록강 이동의 땅을 고려에 양도하였다. 이후 고려는 새로운 영역에 6개의 주둔지(강동 6주)를 설립했다. 994년에 고려는 송나라에 요나라에 대한 합동 군사공격을 제의했으나 거부당했다. 이전인 985년에 송나라가 요나라에 대한 합동 군사공격을 제의했을 때 고려는 거부했었다. 고려와 요나라는 한때 우호관계에 있었다. 996년 성종은 요나라의 공주와 결혼했다. 거란제국이 확대되고 세력이 커지면서 그들은 고려에 6명의 주둔지(6주)를 양도할 것을 요구했으나, 고려는 거부했다. 1009년에 강초는 쿠데타를 일으켜 목종을 암살하고 현종을 즉위시켰다. 이듬해 목종 토벌을 빌미로 요나라 성종이 40만 명의 군사로 고려 침공을 주도했다. 한편 고려는 송나라와 관계를 맺으려 했으나 송나라가 1005년에 전연지맹에 동의하면서 무시당했다. 고려는 양규가 이끌었던 요나라와의 1차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강초가 이끌었던 2차 전투에서 패했다. 고려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분산되어 강초를 포함한 많은 지휘관이 포로가 되거나 사망했다. 이후 평양은 방어에 성공했지만 요군은 개성을 향해 진군했다. 현종은 강감찬의 조언에 따라 남쪽으로 나주로 피신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개성은 요군의 공격과 약탈을 당했다. 이후 하공진과 고영기를 보내 요황제에게 직접 경의를 표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재편성된 한국군의 공격으로 보급로를 어지럽혔던 거란족들이 이를 받아들여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란족은 철수 중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고, 양규는 3만 명의 포로를 구출했으나 전투에서 사망했다. 요나라의 역사에 따르면, 거란족은 폭우에 휩쓸려 그들의 갑옷과 무기의 대부분을 폐기했다. 고려 역사에 따르면 거란족은 압록강을 건너며 공격을 받아 많은 사람들이 익사했다. 그 후 현종은 요황제에게 직접 경의를 표한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6주의 양보를 요구받자 거부하였다 거란은 1014년에 압록강에 다리를 놓았고, 1015년, 1016년, 1017년에 연이어 공격했다. 1015년에는 한국군이, 1016년에는 거란군이, 1017년에는 한국군이 승리했다. 1018년 요나라는 소순녕의 형 샤오파야가 이끄는 침략을 개시하며 10만 명의 병사를 거느렸다. 요군은 곧 매복되어 대규모 사상자를 냈다: 고려 사령관 강감찬은 압록강의 큰 지류를 막아 거란 군사들에게 물을 방류했고, 12,000명의 정예 기병이 돌격했다. 요군은 끊임없는 괴롭힘을 받고 개성으로 향했으나 곧 돌아서 방위력 있는 수도를 빼앗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퇴각한 요군은 오늘날의 구송에서 강감찬에 의해 대패를 당하고 겨우 수천 명의 병사만이 탈출했다. 성종은 다시 침략하려 했으나 내부의 반대에 직면했다. 1020년 고려가 공물을 보내고 요나라가 받아들여 명목상 속국관계를 재개했다. 선종은 현종에게 직접 경의를 표하거나 6개의 주둔지를 양보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유일한 조건은 '속국선언'과 구속된 요 사절의 석방이었다. 요나라 역사는 현종이 항복하고 선종이 사면했다고 주장했지만, 한스 비에렌슈타인에 따르면 이는 양국이 대등한 파트너로서 평화를 맺었음을 의미하며 이는 1022년에 공식화되었다고 한다. 현종은 치세를 유지하며 송나라와의 관계를 유지했다. 개성은 이전보다 크게 재건되었고, 1033년부터 1044년에 걸쳐 압록강 하구에서 한반도 동해안에 이르는 성벽인 천리장성이 세워졌다. 요나라는 다시는 고려를 침략하지 않았다.

 

(5) 고려 초기의 황금기

 

  고려와 거란의 전쟁 이후 동아시아에서는 고려·요·송 사이에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다. 요나라에 승리하면서 고려는 군사력에 자신감을 갖고 더 이상 거란의 군사적 위협을 걱정하지 않았다. 송나라의 복비는 고려의 군사력을 높이 평가했으며, 요나라는 고려를 두려워한다고 하였다. 나아가 고려인의 태도에 대해서는 저항세력에 의해 동화되거나 거란족의 속국이 된 여러 부족과 민족 가운데 고려인만이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송나라는 고려를 잠재적 군사동맹국으로 여기고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한편 요나라는 고려의 불교에 대한 애착을 호소하고 고려와 보다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여 송과 고려 간의 군사동맹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요나라는 불교의 지식과 공예품을 고려에 제공하였다. 11세기에 고려는 송나라와 요나라 어느 한쪽에 군사적 우위를 부여할 수 있는 국가로 여겨졌다. 요나라와 송나라 황제를 대표하는 칙사가 고려에 갔을 때 종주국이 아닌 동료로서 받아들여졌다. 고려의 국제적 명성은 크게 높아졌다. 1034년부터는 송나라 상인들과 여러 여진족과 탐라국 사절들이 매년 개성에서 열리는 고려 최대의 민족행사인 팔관회에 참가하였다. 송나라 상인은 중국 대표로 참여하였고 여진족과 탐라국의 사신들은 고려 천하의 구성원으로 참여하였다. 문종 즉위 기간에는 거란과 일본도 많이 참석했으며, 제주도의 탐라국은 1105년 고려에 편입되었다. 고려의 황금기는 12세기 초까지 약 100년간 이어져 상업적·지적·예술적 성취의 시기였다. 수도는 무역과 산업의 중심지였으며, 상인들은 1920년까지 사용되던 세계에서 가장 초기의 복식 부기 제도 중 하나를 개발했다. 고려사는 1024년, 1025년, 1040년에 아라비아에서 상인들이 왔고 1030년대부터 매년 수백 명의 송나라에서 상인들이 찾아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인쇄와 출판의 발전이 있었으며 철학 문학 종교 과학 지식을 넓혔다. 고려는 책을 대량으로 출판 수입하여 11세기 말까지 중국에 수출하였고 송대는 수천 권의 한국 서적을 번역하였다. 약 6,000권에 이르는 최초의 팔만대장경은 1087년에 완성되었다. 문헌공도 사학은 1055년 해동공자로 알려진 최충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이어서 고려에는 국자감 국립대학에 버금가는 12개의 학원이 있었다. 이에 고려 지배자 몇 명이 민족교육제도를 개혁 및 활성화하여 김부식 등 저명한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1101년 서적포인쇄국이 국가감에 설치되었다. 12세기 초 향학(鄕學)이라고 불리는 학교가 설립되었다. 고려 학문에 대한 숭경은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이 저술한 고려도경에서 볼 수 있다. 문종의 치세는 1046년부터 1083년까지 '태평성대'로 불리며 고려 역사상 가장 번영하고 평화로운 시기로 여겨진다. 문종은 고려시대에 높이 평가되며, 그는 고려 문화의 꽃을 피웠다. 문종에게는 13명의 아들이 있으며, 3명의 장남이 왕위를 계승하였고 4번째 아들은 유명한 의천 스님이다. 고려는 송대에 높이 평가된 고려청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팔만대장경 등 한국 예술문화에서 큰 성과를 거둔 시기였다. 해인사에는 258개의 조각이 남아 있다. 13세기 초 고려는 책을 인쇄하기 위해 금속으로 만든 가동식 활자를 개발했는데, 이것은 유럽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보다 200년 앞선 것이다.

 

(6) 결론

 

  이와 같이 고려 초기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다음 글에서는 고려 중기의 역사에 대해 다루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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