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 대하여
현대사
(5) 제 4 공화국
이번에는 제 4공화국의 설립 배경 및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제4공화국(1972년 11월~1981년 3월)은 대한민국의 정부이다. 제4공화국은 1972년 국민투표에서 유신헌법이 승인되어 박정희 대통령이 보유한 사실상의 독재권력을 성문화하고 제3공화국을 계승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이 암살될 때까지 박 대통령과 민주공화당은 중앙집권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유신체제 아래 통치했다. 제4공화국은 박 대통령의 후계자인 최규하 씨의 정치적 불안 정기에 접어들면서 박 대통령 사후 선포된 계엄령이 확대되었다. 최씨는 1979년 12월 12일 쿠데타로 전두환에 의해 비공식적으로 전복돼 계엄령에 대한 광주 봉기 무력 진압을 시작했다. 전두환 장관은 1980년 5월 17일 쿠데타를 일으켜 통일국민회의 산하에 군사독재정권을 수립하고 국회를 해산했으며 1980년 8월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제4공화국은 1981년 3월 새 헌법의 채택으로 해산되어 제5공화국으로 대체되었다.
(1) 설립 배경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1년 7월부터 5.16 쿠데타를 주도한 지 두 달 만에 집권해 한국의 실질적인 독재자 역할을 해왔다. 박 대통령과 그의 지지자들은 한국의 경제발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군사정권 임시정부인 국가재건최고위원회를 설립했으나, 민간정부 복원에 대한 미국의 강한 압력에 직면했다. 1963년 10월 대선에서 민간인으로 출마하기 위해 퇴위하고 현직 윤보선 대통령을 물리쳤다. 제3공화국은 두 달 뒤인 12월 출범해 국회에서 민정 복귀를 선언했습다. 사실상 정부가 최고위원을 중심으로 국회는 민주공화당이 장악했기 때문에 박 대통령의 군사독재 연속이었다. 박 대통령은 1967년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했고, 국회는 1971년 신민주당 김대중 대선에서 가까스로 승리한 3선 개헌안을 가결했다. 1970년대 초부터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국민과 경쟁 정치인들 사이에서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신민주당이 1968년 32.7%에서 44.4%로 상승하여 민주공화당에 대한 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둔 것으로 나타났다. 1960년대 급격한 경제성장이 둔화되면서 박 대통령의 권위주의 통치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높아졌다. 이어 박 대통령은 냉전시대 정치, 특히 닉슨 독트린 하에서의 미국 공산주의 정책 변화에 불안감을 느꼈다. 박 대통령 정권의 정당성은 철저한 반공주의에 달려 있었고 동맹국들이 그 정책을 완화하는 것은 박 대통령 통치의 근간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1971년 12월, 박 대통령은 '국제 정세의 위험한 현실에 근거한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2) 설립 과정
1972년 10월 10일 박정희 전 대통령은 10월 유신이라는 이름의 쿠테타을 일으켜 국회를 해산시키고 1963년 헌법을 중단시켰다. 또한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새로운 헌법 제정에 착수했다. 박 대통령은 몇 주 전 비슷한 쿠데타를 일으킨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으로부터 자신의 쿠데타에 영감을 받았다. - 유신 헌법 제4공화국은 유신헌법에 의해 통치되며, 우리말로 회복 또는 갱신을 뜻하는 유신이라고도 쓰여졌다. 유신은 일본을 천황의 실효 지배하에 두고 19세기 후반에 일본이 세계 강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메이지 유신의 구성요소와 같은 중국어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유신이라는 말의 의미는 유신헌법 하에서 사실상 모든 통치권력을 박 대통령의 손에 집중시켰다는 데 있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에게 부여된 압도적 행정권과 입법권을 특징으로 하는 지극히 권위주의적인 문서였다. 그의 임기는 6년으로 연장되었고 재선에 제한은 없었다. 대통령은 국민에 의해 대표가 선출된 선거인단인 전국통일회의를 통해 간접적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대선 출마 조건은 매우 까다로워서 후보자 1명만 투표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는 헌법상의 자유를 정지하고 법령에 의해 통치할 폭넓은 권한을 부여받았다. 대통령은 국회를 마음대로 해산시킬 뿐 아니라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임명할 권리도 갖고 있어 사실상 의회 다수결을 보장하고 있었다. 유신헌법은 박 대통령이 지난해 12월부터 행사해 온 비상권한을 모두 법전화해서 사실상 대통령직을 합법적 독재정권으로 만들었다. 박 대통령은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는 경제가 여전히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대신 대통령 자리가 견고하고 도전이 없는 '한국형 민주주의'만이 나라를 안정시키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1972년 11월 21일 유신헌법은 1972년 한국 국민투표에서 91.9명의 투표율로 92.3%라는 믿기 어려운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제3공화국을 해산하고 제4공화국을 수립하게 된 것이다. 박 대통령은 1972년 4선, 1978년 5선으로 재선됐지만 모두 무저항이었다. 제4공화국은 1970년대 박 대통령의 인기와 점점 노골화되는 독재정치에 대한 관용이 꾸준히 떨어지면서 더 큰 불안을 겪었다. 유신헌법은 박 대통령이 시민의 자유를 합법적이고 더 공공연히 침해할 수 있도록 했으며 특히 반대세력을 탄압했는데 이는 박 대통령의 정권에 대한 저항을 더욱 격화시켰다. - 김대중 납치 사건 1971년 대선 직후 김대중은 자동차 사고를 당해 고관절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었다. 김 씨는 이 사고가 박 대통령의 암살 시도이며, 안전을 위해 일본으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반체제적인 한국민주화운동을 형성했다고 믿었다. 김씨는 1972년 유신헌법 제정 후 스스로 일본으로 망명했다. 1973년 8월 8일 도쿄 호텔 오미야에서 열린 민주통일당 회의에서 김 위원장이 납치되었다. 김 씨에 따르면 납치범들은 김 씨를 한국행 도중 바다에 던져 대한해협에서 익사시키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해상자위대가 추적을 시작하고 납치범들이 김 씨를 갑판으로 데려오자 배를 향해 조명탄을 발사하는 바람에 이들은 이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김 씨는 이후 부산에서 풀려났고 납치 닷새 만에 서울 자택에서 생존한 채 발견됐다.
(3) 인민혁명당 사건
1975년 4월 국민혁명당 사건은 국가보안법상 영장 없이 1024명이 KCIA에 의해 체포되면서 다시 불거졌다. 체포된 사람들은 인민혁명당으로 알려진 북한의 지원을 받은 급진적 사회주의 조직을 재구축하려 한 혐의로 기소되었고, 1965년 8월 남한의 반공법에 따라 8명이 설립되어 체포되었다. 당초 사건과 마찬가지로 체포자의 대다수는 무죄가 되었고, 이 중 253명이 투옥되었다. 대법원은 9일 체포자 중 도예종, 여정남, 김영원, 이수영, 하재완, 서도원, 손상진, 우홍선 등 8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8명 전원이 사형 발표 후 불과 18시간 만에 처형되었다. 도예종은 1965년 체포된 최초 8명 중 한 명이다. 인민혁명당 사건은 남한 밖에서 주목받았고 박 대통령의 정권에 대한 부정적인 보도가 많았다. 내부적으로는 이번 사건에 대한 지식은 국가의 엄격한 검열법 때문에 대학이나 교회를 통해 은밀하게 공유되는 외국 신문사의 정보와 직접 경험에 국한되어 있었다. 국민혁명당을 공산주의자가 아닌 민주화운동가를 탄압하기 위한 익살극으로 보는 사람이 대부분이며, 사건 소식이 국내외로 퍼지면서 민주화운동을 대담하게 전개하기도 했다.
(4) 박정희 암살과 제 4 공화국의 해산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국장 겸 청와대 경호실장에 의해 청와대 내에서 암살되었다. 박 씨와 경호원 4명, 운전사 4명이 김 씨를 비롯한 KCIA 요원들에 의해 살해된 이유는 불분명하다. 18년간의 독재정권 끝에 박 씨가 사망함으로써 한국에서는 즉각 정치적 혼란이 빚어졌다. 1975년부터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지만 곧 군부 내 계파에 의해 소외됐다. 박 전 대통령 서거 후 계엄령이 선포된 뒤 정승화 장군이 행정장관을 맡고 이날 전두환 소장을 임명해 합수부를 지휘했다. 10월 27일 천 씨는 일방적으로 KCIA와 정부 정보기관을 장악했다. 통일위원회는 12월 6일 유신헌법의 틀에 따라 최규하 대통령의 당선을 확정했으나, 6일 만에 정 장군을 강제 연행해 구속하고 12월 12일 쿠데타를 주도했다. 이 시점에서 최씨는 정부의 의미 있는 권한을 잃었고, 1980년 초에 전씨가 중앙정보국장에 취임했다. 1980년 5월 전 후보는 17일 쿠데타를 일으켜 통일국민회의 산하에 군사독재정권을 수립하고 국회를 해산한 뒤 다음날 광주에서 광주 봉기가 항의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전씨는 계엄령을 강화하고 군의 항의행동을 폭력적으로 진압해 약 200~600명이 폭동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광주 봉기는 성공적으로 진압되었지만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전국적 지지세를 굳힌 것이다. 8월 최 대표는 사임했고 천 대표는 1980년 전국위원회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돼 무저항으로 99.37%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천 대표는 10월 모든 정당을 폐지하고 1963년부터 한국을 통치해 온 박정희 민주공화당의 기치를 사실상 바꾼 민주정의당을 창당한 바 있다. 전 장관은 박 대통령의 유신헌법보다 권위주의적이지 않은 새 헌법을 제정했지만 그래도 대통령에게 상당히 넓은 권한을 주었다. 그는 1981년 2월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되었다. 1981년 3월 3일에 제4공화국은 해체되고, 제5공화국이 수립되었다.
(5) 결론
지금까지 제 4공화국의 설립 배경을 비롯한 제 4공화국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다음 글에서는 이어서 제 4공화국의 경제, 사회 그리고 국제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사에 대하여 8. 현대사 [6] 제 5공화국; 역사 (0) | 2023.10.15 |
---|---|
한국사에 대하여 8. 현대사 [5] 제 4공화국 ; 경제, 사회 및 국제 관계 (0) | 2023.10.15 |
한국사에 대하여 8. 현대사 [5] 제 3공화국; 경제, 교육 및 국제 관계 (0) | 2023.10.15 |
한국사에 대하여 8. 현대사 [5] 제 3공화국(1963-1972); 배경 및 설립 과정 (0) | 2023.10.15 |
한국사에 대하여 8. 현대사 [4] 제 2공화국 (2) (0) | 2023.1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