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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한국사에 대하여; 시대적 흐름에 따른 각 나라에 대한 고찰 3. 신라 [1] 역사

by melodic 2023.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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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 대하여

시대적 흐름에 따른 각 나라에 대한 고찰

3. 신라

[1] 역사

 

  이번 글에서는 신라의 역사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삼국시대에는 한국의 중부와 남부는 삼한이라고 불리는 3개의 연합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신라는 12명의 연합국 중 진한으로 알려진 사로국으로 시작되었다. 사로국은 후에 고조선에서 진한육씨로 알려진 6개의 씨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 창립

 

  기록에 따르면 신라는 기원전 57년 현재 경주를 중심으로 신라의 박혁거세에 의해 창건되었다. 혁거세는 백마에서 낳은 알로 부화하였다고 전해지며, 13세가 되면 6개의 씨족이 왕이 되어 '사라국'을 건국하고 나중에 신라 왕국이 된다. 신라는 초기 고조선 예맥 난민들이 최초로 세운 사로(沙老)라는 이름으로 도시국가로 출발하였다. 또한 고구려의 침략 후 레란 사령부에서 도망치는 분산된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이후 인근 진족과 예족을 북부로 편입했다. 신라의 탈해는 신라 남해의 사위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석탈해는 일본 동북쪽 1000리에 위치한 용성국 또는 다파나의 왕자였다. 신라 남해의 유언으로 신라의 제4대 왕이 되었다. 어느 날 탈해는 토함산 옆에 낮은 봉우리를 발견하여 그것을 자기 집이라고 포장하고, 그곳에 살던 호공이라는 일본 관리의 집 옆에 숯을 묻었다. 그는 자신의 조상이 대장간이라고 속였지만, 호공의 가족은 그 집을 가져갔다. 호공은 속아서 자신의 집과 재산을 석탈해에게 넘겼다. 이 시기에 경주 김씨의 선조인 김알지가 석탈해에게 입양을 갔다.

 

(2) 초기 역사

 

  수도 이외의 영토는 신라 파사(80~112) 시대에 크게 정복되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관리들에게 농업을 장려하라고 명령했다. 음집벌과 실직곡 사이에 영토 분쟁이 발생하여 양국은 먼저 신라 파사에 중재를 요청하였고, 당시 현지 지도자였던 김해 수로왕에게 신라 파사가 전달되었다. 수로왕은 영토 문제를 해결하고 음집벌에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102년에는 신라의 파사가 음집벌을 침략하여 타추간이 항복하고 신라에 겁먹은 실직곡과 압독도 항복했다. 6년 후 내륙 지역에 진입하여 다불국·비지국·초팔국을 공격하여 병합했다. 신라 내해시대(196~230년) 반도 남부의 패권을 결정하기 위해 포상팔국 전쟁이 발발하였다. 209년에 낙동강 유역의 여덟 소국이 신라에 우호적인 아라국을 공격하자 아라국 왕자가 신라에 구원군을 요청했고, 왕은 석우로 황태자에게 군대를 모아 8왕국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석로 왕세자는 아라국을 구하고 붙잡혀 고향으로 돌아온 친 신라,가야인 6000명을 구했다. 3년 뒤 여덟 나라 중 세 나라가 신라에 반격을 개시한다. 수도 남동부 염해에서 전투가 벌어져 신라왕이 나와 전쟁이 끝나고 세 나라의 병사들은 패배한다. 2세기까지 신라는 한반도 남동부 지역에 별도의 국가로 존재했다. 인근 진한 영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지만 3세기를 통해서는 느슨한 연맹 중 가장 강한 도시 국가에 불과했을 가능성이 높다. 백제는 서쪽으로 약 250개의 왕국에 집중하여 마한연합을 추월하였다. 남서쪽에는 변한이 가야연맹으로 대체되었다. 조선 북부에서는 기원전 50년경 고구려가 313년 마지막 중국군 사령부를 파괴하고 위협적인 지역 강국으로 성장했다.

 

(3) 중앙집권 군주제의 출현   

 

  신라의 내물왕(356~402년)은 김씨가 세습군주제를 확립하고 마립간이라는 왕권을 획득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내물이 여전히 이사금 칭호로 등장한다. 그는 550년 이상 지속된 경주 김씨 왕조의 출발점으로 많은 역사학자들로부터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김씨가 500년 넘게 왕위를 독점했을 때도 창업자 박혁거세의 숭배는 계속되었다. 377년에 신라는 중국에 사자를 보내 고구려와 관계를 수립했다. 서쪽으로는 백제, 남쪽으로는 일본의 압력에 직면하여, 4세기 후반에는 신라가 고구려와 동맹을 맺었던 것이다. 그러나 광개토왕 이후 신라는 종속국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였다. 427년에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을 때 신라의 눌지왕은 백제와 동맹을 맺었다. 신라의 법흥왕(514~540년) 무렵 신라는 불교를 국교로 하고 한국 고유의 원호를 가진 본격적인 왕국이었다. 신라는 가야와 신라의 전쟁에서 가야연맹을 흡수하여 532년 금관가야를 병합하고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으로 국경을 넓혔다. 신라의 진흥왕(540~576년)은 강력한 군사력을 확립하였다. 신라는 백제가 한강지역에서 고구려를 몰아낸 뒤 553년에 백제로부터 전략지역 전체의 지배권을 빼앗아 120년에 걸친 백제-신라동맹을 깨뜨렸다. 진흥왕은 또한 화랑을 세웠다. 초기 신라는 진덕왕의 죽음과 성골 체계의 소멸로 막을 내렸다. 

 

(4) 통일 신라

 

  7세기에 신라는 중국 당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660년에 신라 무열왕(654~661) 아래 백제·당전쟁 이후 신라·당 동맹이 백제를 정복했다. 668년에 신라의 문무왕(무열왕의 후계자)과 김유신 장군 아래 고구려-당전쟁 이후 신라-당 동맹이 북쪽으로 고구려를 정복했다. 이후 신라는 당나라와 10년 가까이 싸워 당나라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중국군을 반도에서 추방하고 마침내 근대 평양까지 통일왕국을 수립했다. 옛 고구려 북부지역은 후에 발해로 재흥한다. 신라 중기의 특징은 진골귀족을 희생시키면서 군주제 세력이 높아진 것이다. 이는 신라의 반도통일로 얻은 새로운 부와 위신, 그리고 통일 초기에 이어 군주제가 몇몇 무장귀족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왕이 가장 강력한 가문과 경쟁자들을 중앙권력으로 숙청할 기회를 주면서 이루어졌다. 또한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후반까지 약 1세기의 짧은 기간 동안 군주제는 급여 지급 제도와 직전제를 도입하여 귀족 계급의 관권을 박탈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귀족 관리들은 토지를 급여로 사용할 수 있는 보조금('녹읍')을 지급받았다. 그러나 8세기 후반까지 이 왕실의 이니셔티브는 정착한 귀족 계급의 힘을 확인하는 데 실패했다. 8세기 중후반 김씨 가문의 지파 반란이 재연되면서 사실상 왕권을 제한했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3년간 이어진 김대건이 이끄는 반란이였다. 왕권이 침탈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 중 하나는 757년 관위제가 폐지되고 구 세촌제가 귀족 관료들의 급료지로 재설정되었다는 것이다. 신라 중기는 780년에 혜공왕이 암살되면서 신라의 한반도 통일을 이끌었던 무열왕의 왕위 계승이 끝난 시기이다. 혜공의 죽음은 피비린내 나는 것이었고 왕국의 고위 귀족 대부분이 관여한 장기 내전의 정점이었다. 혜공이 죽고 신라의 남은 몇 년 동안 유력한 귀족 가문이 중앙 통제로부터 점점 독립하면서 왕은 꼭두각시 이하로 전락했다. 이후 신라 원성왕(785~798) 집안에 신라 왕권이 정해졌지만 관직 자체는 김씨계 여러 분파 간에 끊임없이 다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 중기에는 국가가 정점을 찍고 왕권이 단기간에 공고해지면서 중국식 관료제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보였다. 신라 국가의 마지막 세기 반은 왕이 인적으로 전락하고 강력한 귀족 가문이 수도와 궁정 밖에서 실질적인 지배권을 쥐는 등 거의 끊임없는 격변과 내전의 하나였다. 후삼국 시대로 불리는 이 시기의 말엽은 각 지역의 역사적 배경을 살린 군사력으로 구성된 후백제·태봉 왕국이 단기간에 출현하여 신라가 고려 왕조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5) 결론

 

  지금까지 신라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다음 글에서는 신라의 군사 및 대외 관계의 특징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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